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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은낭이 죽인 것.

片/結 / 2016. 2. 14. 02:21



“날아가는 새를 죽이는 것처럼 쉽다.” 


부패한 관리를 제거할 것을 명령하면서 여도사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섭은낭의 첫 번째 임무. 첫 살인일 것이다. 날아가는 새를 죽이는 것이 말처럼 쉬울까? 그렇게 살인이 쉬운 것인가? 빠르고 경쾌한 날갯짓을 가진 새를 죽이는 것만큼, 살인이 쉬울까. 이 말의 의미가 궁금해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순간, 섭은낭이 가볍게 뛰어오른다. 손 안의 짧은 비수가 호를 긋는다. 솟구치는 피도, 비명도 없다. 말 위의 남자가 잠들 듯 쓰러진다. 


두 번째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온 섭은낭은 말한다. ’ 아이가 너무 귀여워 죽일 수 없었습니다.’ 천진할 정도로 당돌한 이유. ‘아이가 보고 있어서’도 아니고 ‘아이가 귀엽다’고. 그녀의 스승은 섭은낭에게 ‘검술은 완벽하나 마음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섭은낭의 정인이었던 전계안을 암살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다. 여기까지가 이 영화의 프롤로그. 


<자객 섭은낭>은 허우 샤오시엔의 신작이다. <빨간 풍선> 이후 8년 만의 새 작품이라는데 무협영화로 돌아왔다니 놀랍다. 어떤 사람들은 <자객 섭은낭>에 ‘수정주의 무협극’이라는 타이틀을 붙인다. 아마도 익숙한 무협 장르의 틀을 가뿐히 뛰어넘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허우 샤오시엔은 무협영화의 ‘틀’ 보다는 자객의 ‘마음’에 집중한다. 간혹 부득이하게 벌어지는 검격 장면에서 조차, 섭은낭은 표정의 변화 없이 상대방의 공격을 흘려보낸다. 그녀의 모습은 실력이 뛰어난 고수의 퐁모 보다는 도인에 가깝다.





거리를 두고 인물들을 관찰하듯 포착하는 카메라는 섭은낭의 시선과 닮아 있다. 전계안의 첩의 처소를 보여주는 시퀀스를 꼽아볼 수 있다. 이 장면은 몹시 아름답다. 열린 창문으로 넘어오는 바람소리,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화면에 가득하다. 침소를 장식한 얇은 천의 움직임에 따라 섭은낭의 마음도 일렁이는 것 같다. 전계안과 본처가 한 화면에 잡힐 때, 그는 매번 화면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동일한 구도로 촬영된 첩의 처소에서 전계안은 화면의 중앙을 차지한다. 전계안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섭은낭은 종종 카메라의 위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등장인물의 시점 쇼트를 쉽게 허용하지 않던 감독의 전작들과 다른 점이다. 그림자처럼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낸 섭은낭은 지니고 있던 정표를 남겨둔다. 전계안은 이를 두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한 다음 죽이려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섭은낭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녀는 오랫동안 소중히 품어왔을 정표를 미련 없이 남겨두고 떠난다. 이 영화는 마치 두 개의 다른 영화가 하나의 공간에 공존하는 것 같다. 섭은낭은 고요하고 침착하며, 예측하기 어렵다. 그녀는 상상 가능한 모든 인간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는 등장인물들 사이를 표표히 유영한다. 정치적인 야망과 음모, 처와 첩의 암투, 섭은낭을 완벽한 암살자로 거듭나게 하려는 스승의 욕심, 자신의 외로움을 거울처럼 보듬어줄 사람을 갈구하는 가신 공주의 외로움과 슬픔. 


그녀를 두고 스승은 자객으로서 마음이 모질지 못하다며 질책한다.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그녀를 스승이 공격한다. 승부는 단 몇 합만에 결정 난다. 이번에도 죽이지 않았다. 스승의 품에 아주 짧고 얕은 칼 자욱만 남긴다. 자신을 키워준 스승에 대해 이보다 더 멋진 인사는 없을 것이다. 섭은낭은 자객으로서 실패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제는 변해버린,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마음도,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도, 원치 않았던 자객의 길로 내몰았던 과거도. 이제는 어쩔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그녀는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살인은 ‘날아가는 새를 죽이는 것처럼’ 쉽다. 여도사의 말이 맞았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마음이다. 


그녀는 가장 어려운 상대를 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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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글을 찬찬히 다시 읽어 보았다. 한 네번째쯤 정독하다가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플레쳐와 듀나가 같은 구석이 하나 있다는 점이다. 두 인물간의 공통점은 폭력성이다. 물론, 비록 가상의 캐릭터이지만 얼굴과 이름을 내놓고 패악을 일삼는 플레쳐가 그나마 듀나보다 낫다는 점은 인정하자. 재미있지 않은가? 가상의 캐릭터인 플레쳐는 얼굴과 이름이 있지만, 실제 세계에서 살아가는 듀나는 얼굴도 이름도 없다. 듀나의 이 글을 읽으면서 한참 인터넷을 달구었던 MBC의 과감한 '실험'이 떠올랐다. 바로, 게이머의 폭력성을 실험한다는 명목으로 PC방의 전원을 꺼버린 사건이다. 


플레쳐의 목적은 제 2의 챨리 파커를 발굴하는 것이다. 듀나의 목적은… 열심히 생각해 봤지만 정말로 모르겠다. 하지만 둘 모두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을 '활용'했다. 이쯤되면 '선호'또는 애호라고 표현해도 될정도다. 마치, 듀나가 나이 어리거나  여리여리한 이미지의 여성 연예인에 대한 애호와 선호를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플레쳐와 듀나 모두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듀나는 비틀린 자신의 뇌에 맺힌 한국의 현실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하기 위해 <위플래쉬>를 빌려온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듀나와 선택된 몇 명의 친구들 빼고 모조리 오독하고 있다는 판단은 그야말로 뇌내망상이다. 듀나의 글은 빈약한 근거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행위가 얼마나 글쓴이의 빈약한 바닥을 혹독하게 드러내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듀나를 씹는데에 모두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영화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위플래쉬>를 보고 상영관을 나서면서 나는 플레쳐는 과연 제 2의 찰리 파커가 되었나? 라는 질문을 떠올렸다. 맞다. 영화속에서 언급된 바로 그 찰리 파커, 조 존스가 던진 심벌에 목이 날아갈뻔 했던, 바로 그 찰리 파커, 테렌스 플레쳐는 제 2의 찰리 파커가 되는 꿈을 이루었는가? 플레쳐는 끊임 없는 연습을 통해, 한계를 넘어서 누구도 그의 음악을 품평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누구나 알고 있을것이다. 물론 그의 폭력성이 대단히 독보적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플레쳐의 방식엔 이유와 목표만 있다. 앤드류가 플레쳐의 연습에 참여했던 첫날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플레쳐는 앤드류의 첫 연주를 중단시키고 질문한다. 'Are you rushing or dragging?' 이 질문은 대단히 도전적이다. 앤드류에게는 거의 저승사자의 외침으로 들렸을 것이다. 바로 전 시간, 음정이 틀렸다는 트집으로 밴드 멤버 한 명을 쫒아내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플레쳐는 집요하고 사악하게 앤드류를 장악하기위해 애쓴다. 


영화의 중반, 앤드류가 친척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친척중 한 명은 '어떻게 음악을 평가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 음악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플레쳐가 앤드류를 거의 죽일듯이 달려들며 던졌던 'Are you rushing or dragging?' 이라는 질문과 함께 생각해 보면 재미있다. 놀랍게도, 플레쳐에게는 음악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것 같다. 플레쳐는 앤드류에게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마치 '네 생각을 말해!'라고 채근하는것 같다. 하지만 앤드류는 바로 전시간, 다른 학생이 대답 한 번 잘못해서 밴드에서 쫒겨난 것을 보았다. 그 와중에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플레쳐는 이 초급과정(?)을 통해서 앤드류가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그녀석인지(!) 확인하려 했던것 같다. 이쯤되면 이 영화는 배경으로 음악학교로 바꿔치기한 <매트릭스> 1 편의 모피어스와 네오의 다른 버전처럼 보일정도다. 


앤드류의 밀고로 학교를 그만두게 된 플레쳐는 우연히 다시 마주친 앤드류에게 'Next Charlie Parker'를 발굴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만약에 조 존스가 심벌을 던지지 않고, 그만하면 됐어 찰리, 라고 말했다면 더이상 버드 (챨리 파커의 별명)도 없고 그것만큼 슬픈일은 나에게 없다.' 정말로 감동적인 고백이다. 하지만 플레쳐의 이 말이, 앤드류를 유인하기 위한 거짓말, 마지막 함정에 더 가깝다는것을, 영화를 보고난 우리는 알고 있다. 이미 플래쳐는 제자의 죽음을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말로 포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마도 찰리 파커가 아니라 어쩌면 찰리 파커의 목을 날려버렸을수도 있는 조 존스가 되고 싶었던것 같다. 아, 그러니까 형이 이러는건 너에게 다 애정이 있는거니까 대가리 박어주세요. 이말씀인데, 이정도로 개차반인 플레쳐를 진정 이시대에 필요한 스승상으로 '오독'할 가능성이 다분한, 듀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톡홀름 증후군의 희생자가 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는 듀나에게 나는 오히려 애도를 표하고 싶다. 혹시 이 글을 듀나가 읽는다면, 그리고 혹시라도, 그럴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정말, 억울하다면 딱 한마디만 남겨준다면 여한이 없겠다. '그건 오독이에요. 이 글, PC하지 않아서 불편한건 저뿐인가요?'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대단히 단순하고 알기 쉽다. 듀나의 글의 제목이 '위플래쉬, 한국에서 유달리 성공한 진짜 이유'인데, 이 영화의 성공 이유는 이야기가 단순하고 알기 쉽고 박진감 넘치며 음악이 죽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과, 자신의 선택된 영광스러운 친구들만이 이 영화의 진짜 가치와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그 '오독'의 근거는 대체 어디에서 끊임 없이 샘솟는지 신기할 뿐이다. 오늘의 기승전듀 글 끝. 



기사 링크: http://m.media.daum.net/m/entertain/newsview/20150326160806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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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2014

片/結 / 2014. 9. 28. 11:41




금요일 퇴근해서 밤새 주사를 맞았다. 다치거나 아픈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응급실의 부산함, 누군가의 밭은기침소리, 간호사를 찾는 목소리, 사람들 발소리, 링거 스탠드를 끌고 병원 로비로 나갔다. 밤의 병원은 수족관처럼 고요하다. 자판기의 불빛이 군데군데 괴괴하게 고여있다. 잠들지 못하는 환자 가족들이 로비 여기저기에서 스마트폰을 보거나, 다른 사람과 작은 목소리를 이야기를 나눈다. 값을 치르고 병원을 나서는데 주사를 놓아줬던 간호사가 완치가 되는 게 아녀서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나도 내 몸을 잘 관리하고 싶다. 예전보다는 더 주의 깊게 내 몸이 하는 말을 잘 듣고 싶다. 하지만 관리한다고 관리되는 몸이 아니라는 걸 요즘 깨달았다.


주사를 다 맞고 집에 들어가 잠들기에는 시간이 애매해서 <Frank>를 조조로 봤다. 마이클 패스빈더가 주연이라고 해서 오래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내가 왜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에 빠져있는지 깨달았다. 때로 무언가를 감춰야만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셀리나는 브루스 웨인에게 '지금 당신의 맨얼굴이 가면'이라고 말했다. 배트맨은 'What I do is defines me'라고 말한다. 커다란 머리를 뒤집어쓴 Frank는 Jon에게 'Why covering thing up? right?'이라고 말한다.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오는 이 장면은 역설적이지만 진실을 담고 있다.


커다란 머리 Frank를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그 밑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했다. 때로는 표정이 진실을 가리기도 한다. 상상은 상상일 뿐이다. 내 머릿속에 맺히는 상. 내 머릿속의 얼굴. 그 얼굴과 내 앞의 얼굴은 다르다. 우리는 때로 서로를 오해하고 착각한다. 자신의 마음이 말하는 것을 착각하거나 욕심이 부추기는 방향으로 거짓말을 선택하기도 한다. 어떤 일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도 있는데, 그 대가가 가볍지 않은 경우가 자주 있다. 아아, 실수뿐인 인생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Frank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가 커다란 머리를 선택했는지 솔직하게 Frankly 설명해주지 않는, 음울하고 귀여운 이 영화가 참 마음에 들었다.


** 마이클 패스빈더는 얼굴도 잘생겼고 몸도 이쁘다. 비음이 살짝 섞인 목소리도 멋지고 노래도 잘 부른다. Frank가 훌쩍 뛰어오르는 포스터를 보면서 '썅 심지어 배꼽도 잘생겼어'라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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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은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을 두고,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시간을 사건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윤리적인 결정"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나는 과장이 심한 정성일식 관용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게 말하고 싶다. 거스 반 산트의 관심은 죽음에 대한 매혹에 닿아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의 공간과 시간을 재연을 넘어서, 재현의 극점에 도달하려는 행위에의 매혹. 그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한 순간이 상업영화의 단골 소재인 폭력과 섹스가 아닌 오직 죽음의 순간에 있음을 믿는 것 같다. 전작인 <게리 Gerry>(2002)는 죽음이라는 예외적이지만 필연적인 사건에 영화적 정수, 즉 시네마틱한 무엇이 있음을 감지하고 그것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이 영화는 '죽음 3 부작'의 시작이다. 스테디 캠을 이용한 공간의 횡단, 이를 통한 공간의 직조,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의 해체의 목적지는 사건의 재구성이 아닌, 공간들의 포착에 있다. 거스 반 산트는 스토리텔링으로서의 내러티브에 관심이 별로 없다. '사막으로 들어간 두 남자 중 한 남자가 죽고 한 남자는 살아나온다'는 것이 이 영화의 내러티브의 전부이다.

<엘리펀트>의 시간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겹쳐진다. 시간은 접히고, 구부려지고, 왼쪽이 오른쪽과 연결되고, 아래가 위와 만나면서 시간과 공간을 구축한다. 이 영화는 되돌릴 수 없이 결정화 된, 이미 일어난 실재의 사건을 명징하지만 다시 재현될 수 없는 공동空洞으로 상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중첩되는 방사형의 공간들을 묘파한다.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등 뒤의 카메라의 위치는 관객의 자리이다. 시점 쇼트point of view에 준하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이 위치는 관객으로 하여금 등장인물에 근접한 시선을 가지도록 유도함으로써 정서적 유대감과 동일시를 이끌어낸다. <엘리펀트>는 표준 렌즈(50mm) 이상의 초점거리가 긴 렌즈로 촬영되었다. 이러한 렌즈의 선택은 카메라가 따라가는 인물을 배경에서 약간 도드라지게 한다. 이때 카메라의 심도, 그러니까 초점focus이 맞는 영역area은 극도로 얇아져서, 렌즈의 초점이 맞추어진 바로 앞의 인물과 배경을 제외한 나머지는 흐릿한 공간의 덩어리 같은 것으로 남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계속해서 이동한다. 정확히는, 카메라가 계속해서 이동한다. 일반적으로 이동이 많은 장면들은 카메라의 이동뿐만 아니라 조명의 위치를 고민하게 된다. 이 때 가장 손쉬운 대안은 빛을 받아들이는 양이 많은 밝은 렌즈와 고감도 필름을 선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펀트>는 초점 거리가 긴, 상대적으로 어두운 렌즈를 이용해서 대부분의 장면들을 찍었다. 인물이 밝은 실내에서 어두운 실내로 이동하고 다시 복도에서 건물 사이의 중정으로 이동하면서 화면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급격하게 변화된다. 이 때 중요해지는 것은 등장인물과 배경의 묘사, 연속되는 공간의 지각이 아니라 등장인물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그럼으로써 일어나는 인물과 주변의 끊임없는 변화에 있다. 인물의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 프레임 속 풍경은, 그러니까 관객이 보고 있는, 관객의 시야는 계속해서 새로운 배경과 인물들로 변화된다. 사물과 인물들은 장초점 렌즈로 인해 극도로 얇아진 초점 영역layer 안쪽으로 들어왔다 잠시 머물 겨를도 없이 다시 사라져 간다. 이것은 인물들이 각자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망을, 그 무심한 씨줄과 날줄의 얽힘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쌓여가는 얇고 연약한 삶의 결을 포착하는 이 영화의 시선이다.

사진반의 일라이가 존에게 안부를 물으면서 사진을 찍는 동안 그 뒤로 특활 시간에 늦은 미셸이 뛰어간다. 이 장면은 세 번 반복된다. 아주 잠시 동안 시간 속에서 공유하는 이 공간을 하나의 장 sphere 이라고 한다면 그들 각자의 방향에서 바라본 시간과 공간은 길게 이어지는 복도 어디쯤에서 슬쩍 얽히고, 다시 풀어진다. 이러한 시간의 반복, 공간의 맺힘과 풀림은 장초점 렌즈를 선택한 이유와 동일한 목적을 갖는다. <엘리펀트>는 반복되는 시간의 재연을 통해 인물과 인물이 아주 얇게 겹쳐지는 그 순간들을 찾아낸다. 이러한 구성을 편집의 기교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어차피 반복되는 장면들은 다른 방향에서 다시 촬영한 것이다. 카메라는 횡과 종으로 이동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탐색하고 구축한다. 지각한 존이 교무실에서 나가서 빈 교실에서 울다가 여자 아이의 키스를 받고, 일라이를 만나 사진을 찍고, 학교 바깥으로 나가면서 무장한 알렉스와 에릭을 만나기까지의 짧은 시간은 카메라의 이동, 시간의 반복으로 인해 입체적인 부피를 가진다. 이것은 말하자면 시간을 지구본의 지도처럼 펼친 다음, 다시 부분과 부분이 이루는 조합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가상의 공간을 재현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한가지, <엘리펀트>는 실제의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죽음 3 부작에 해당하는 작품- <게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 - 들이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 작품이 어떤 형태로든 말초적인 호기심을 부추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성일과의 대담에서 전찬일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서 일반 관객과 소통하지 못한 영화’라고 말했다. 그의 지적은 정확하다. 이 영화는 사건을 설명하거나 사건의 원인을 밝혀내려 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영화라는 재연再演의 매체가 지닌 자신의 근원적인 한계를 넘어 재현再現의 극점에 도달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한다.

<엘리펀트> 후반부의 총격장면은 어떤 사실적인 기록 화면보다도 더 충격적이다. 사람이 사람을 쏘아버린다는 것. 사람이 누군가의 생명을 어떠한 감흥도 없이 앗아버린다는 행위는, 일반적인 인식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우리는 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영화도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단서로 보이는 것들이 띄엄띄엄 던져져 있지만, 어떠한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엘리펀트>는 원인을 탐색하지 않는다. 이유도 묻지 않는다. 예를 들어 TV에서 방영되는 나치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많은 오해를 가져왔다. 평자들은 나치의 지식인 탄압과 괴벨스의 프로파간다 전략을 현대 미국에 대한 코멘트로서 어떻게든 읽어내려고 많은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한 시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자막 없이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이러한 이미지가 배음overtone으로서의 노이즈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펀트>는 실재의 사건을 세속의 호기심이 아닌 영화적 논리로 충실히 구축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 중심에는 거대한 동공洞空이 존재한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될 수 없는 죽음. 다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 죽음이 거기 있었고, 삶 또한 존재했다는 것을 투명한 중재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히 ‘리얼’한 것이 아닌, 시네마틱 공간의 새로운 구축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부재不在의 문제이다. 이미 일어난 일, 그러나 지나간 일을 어떻게, 왜 재현하는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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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다.

片/結 / 2013. 12. 29. 18:46

아침 일찍 일어났다. 빵 한조각과 뜨거운 음료를 보온병에 챙겨 넣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평소 꼽아 뒀던 조조 영화를 봤다. 극장 한 켠을 빌려 조그만 전시회가 걸려 있었다. 조그만 테이블 위에는 작가의 책도 판매되고 있었다. 작가가 여행을 다니면서 드로잉 한 그림들과 글을 모은 책이었다. 책의 첫 장의 문장은 "이곳이 싫었다"로 시작해서 "모든 걸 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진 것들이 낡고 더러워만 보여서 몽땅 버리고 새로 사고 싶지만, 나는 가난했다."로 끝났다. 스무살 무렵의 자기 연민과 자학이 가득 넘치다가 자기합리화로 끝나버리는 그런 책일 것 같아서 손이라도 데일 것처럼 피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림이 너무 좋았다. 형태를 따라 너울거리는 얇은 선들이 좋았다. 얼핏 장자크 상페를 닮은 그림이지만, 묘하게 마음을 끌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바로 극장을 떠나지 못하고 삼십분 넘게 서성였다. 결국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극장쪽에서는 작가님이 가지고 있는 책을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금만 받고, 모두 작가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기꺼이 현금을 지불했다. 아마도, 출판사에서는 쥐꼬리만큼도 안되는 선인세와 선심이라도 쓰듯 재고에 가까운 이 책들을 작가에게 떠넘겼을 것이다. 


이 책의 작가는 '이 곳이 싫어' 많은 것들을 버리고 떠났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책을 냈다. 어떤 이유로, 어떤 목적으로 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지불한 돈이 정말로 작가에게 돌아가는지도 나는 알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돈으로 밖에 누군가를 지지하고 응원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먹먹하다. 여행을 다녀온다고 세상이 변하거나 내가 변하지 않는다. 의외로 일상은 단단하고 완고하다. 책을 다 읽고 나니 하늘이 어둑해졌다. 눈발이 신산하게 흩날린다. 집에 돌아가 저녁을 해먹고 빨래를 해야겠다. 도시락으로 싸갈 찬거리를 준비하고 손발을 깨끗이 닦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일요일이 다 지나갔다. 짧은 휴가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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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Llewyn Davis (2012)

片/結 / 2013. 11. 30. 14:50





코엔 형제의 신작 <Inside Llewyn Davis>에서 존 굿맨이 연기한 롤랜드 캐릭터는 이질적이다. 그는 갑자기 등장해서 약에 취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버려진다. 부두교를 공부했다고 주장하는 이 남자가 정말로 무엇을 하는 인간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단 두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성격이 파악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코엔 형제는 사실성을 위해 일부러 모호한 캐릭터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무의식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이러한 캐릭터는 코엔 형제의 다른 영화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애리조나 유괴사건>에서 주인공을 추격하는 거구의 남자, <시리어스 맨>의 늙은 랍비, <바톤 핑크>의 세일즈맨 찰리. 일반적인 시나리오 작법에서 캐릭터는 반드시 어떤 역할을 통해 이야기를 발전시킨다. 하지만 코엔 형제의 영화속 캐릭터들은 갑자기 나타나 어떤 이야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심지어 주인공 르윈의 내면(inside)이 어렴풋이 짐작될만 할 때 영화는 갑자기 끝난다. 


코엔 형제는 르윈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똑같은 장면을 영화의 시작과 끝 부분에 배치한다. 차이점이라면 고양이가 집을 나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다. 두 번째 아침 장면에서 르윈은 이미 알고 있다는듯이 솜씨좋게 고양이의 가출을 저지한다. 이 장면 때문에 영화에서 일어난 일들의 대부분이 마치 르윈의 꿈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프닝에서 르윈은 'Hang Me, Oh Hang Me'를 부른뒤 '또 한 곡을 부를거지만, 어차피 포크송은 그놈이 그놈이기 때문에 크게 기대는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도, 우리도 대부분 그날이 그날같은 매일을 살아 간다. 만약, 어떤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면, 그를,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디에도 닫지 못하는 폐허(ruin)와도 같은 삶의 불가해한 풍경을 묘파하는 이영화는 몹시 아프다. 하지만 코엔 형제의 영화가 매번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르윈이 뉴욕에서 시카고로, 다시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만났던, 끝없이 다가오고 사라지는 길위의 표정들처럼, 삶이 정물 보다는 비정형의 흐름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신 운전해주는 조건으로 시카고에서 뉴욕까지 차를 얻어탄 르윈은 어두운 도로로 뛰어든 무언가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차를 세운다. 인적없이 캄캄한 도로 위로 눈발이 신산하게 흩날린다. 무겁게 눈꺼풀을 내리누르던 잠도 달아나 버린것 같다. 자동차 앞범퍼에는 피가 묻어있다. 어떤 짐승을 친것 같은데 도로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피, 눈, 어둠,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말러의 교향곡, 숲속으로 절룩거리며 사라지는 개인지 고양이인지 알 수 없는 짐승. 세상이 잠시 멈춘 것 같은 이 장면은 신비롭고 아름답다. 이질적인 것들의 우연한 만남, 누구도 예상할 수 없고 제어 할 수 없는 우연성의 결절들. 르윈 데이비스라는 어떤 남자의 내면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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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맥퀸은 <Shame 셰임>의 모든 대화 장면을 촬영하면서 인물들을 한 화면에 담아낸다. 샷 - 리버스 샷은 영화에서 단 두 번 사용된다. 바로, 지하철에서 브랜든이 어떤 여자와 은밀한 눈빛을 교환할 때이다. 브랜든에게 있어 관계는 직접적 대상이 아니라 상상적 대상과 이루어질 때, 또는 그러한 상황을 망상할 때 더 수월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 시작과 끝의 두 시퀀스를 제외한다면, 이 영화에서 시선의 교환은 일어나지 않는다. 쌍방향 교신을 가장하는 화상 채팅이나 타인의 섹스를 관음하는 포르노에 탐닉하는 브랜든의 시선은 통상적인 '현대사회에서 관계의 소멸'의 징후가 아니다. 개인의 감각을 넘어서는 과포화된 관계망들, 스마트폰, 네트워크 속의 'anonymous'로 수렴되는 과잉된 익명성 속에 브랜든의 시선은 위치한다. 자아는 익명성 안에 숨으려 하지만 오히려 잘게 복제되어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상태. 브랜든이 두 명의 여인과 벌이는 섹스는 쾌락보다는 고통에 가까워 보인다. 사정이 가까울수록 브랜든의 표정은 처연해진다. 한순간 그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데, 이 시선은 섬뜩하고 아름답다. 그는 마치 거울 너머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브랜든 자신이면서 또 그 누구도 아니며, 어쩌면 들켜버린 바로 나 자신, 또는 당신이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 남은 자아의 한 조각까지 모두 방출해 버리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면서 더는 자신이 아닌 상태.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자신을 놓아버리지 못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의 마지막 섹스 장면은 역설적이다. 사정하는 순간의 짧은 죽음은 생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삶은 제어 할 수 없는 우연성의 칼날 끝에 맺히는 물방울과도 같다. 브랜든은 마치 자신과 모든 것으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섹스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마치 그의 여동생이 팔에 무수한 자살시도의 흔적들을 남기는 것처럼, 모든 절멸의 방식은 말하기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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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인간이다.

片/結 / 2013. 9. 14. 17:25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밝힌 상현은 태주의 집으로 찾아간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장면을 볼 수 있다. 아직은 상현이 뱀파이어라는것을 두려워하는 태주는 그에게서 도망가려고 한다. 도망가려는 태주를 상현은 화장실 한 구석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을 설득한다. 이때 화면 좌측의 거울엔 상현의 모습이 비춰진다. 뱀파이어는 그림자가 없고(또는 희미하고) 거울에 비춰지지 않는다. 이것은 뱀파이어 전설(장르)의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아마도, 뱀파이어는 인간과 다른 (어쩌면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거울에 모습이 비춰지지 않거나 그림자를 지니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 어떤 전승에서는 뱀파이어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고, 거울에 비춰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질문을 다시 옮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장면에서 거울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누구인가 ? 그것은 상현이 아니라 태주다. 이 장면을 단순히 태주의 위치가 거울에 비춰질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왜 거울 속에 두 사람은 함께 비춰지지 않아야만 했을까? 왜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을 보아야만 했을까? 거울에 비춰진 상현은 누구(무엇)인가 ? 그리고 거울 바깥의 태주는 또 누구인가?

뱀파이어는 포식자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뱀파이어는 마치 여우가 닭을 잡아 먹듯 인간의 피를 마신다. 결코 희생물의 살을 취하지 않고 오로지 흡혈만한다. 피는 생명의 정수다. 그러므로 뱀파이어가 피를 빠는 것은 식욕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살고자 하는 격렬한 욕구, 갈증 thirst 이다. 그림자도 남지 않고, 거울에도 비춰질 수 없는, 죽어있는 자인 뱀파이어가 어떻게든 현재를 살아가려는 욕망, 지금 여기에 살아있기 위해, 두 눈을 멀게 할 정도로, 희생물의 생명을 찾아 내미는 두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격렬한 욕망이다. 

그렇다면, 상현은 정말로 '뱀파이어'인 것일까? 이 지점에서 박찬욱은 일종의 뱀파이어에 대한 존재론적 정의를 시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현이 거울에 비춰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행동이 인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현이 흔히 말하는 '휴머니즘'이 가득한 뱀파이어라고 오해는 하지 말자. 그는 여전히 뱀파이어다. 그런데 그는 인간처럼 행동한다. 뱀파이어의 위선. 인간의 위선. 이후에 뱀파이어가 된 태주는 상현의 이런 모습을 비웃는다. 포식자로서의 능력과 자격을 지녔으면서 그것을 낭비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거울 바깥의 태주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는 인간이었을까, 아니면 갈증에 가득찬 뱀파이어였을까. 이 영화의 마지막을 생각해 본다면,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다, 인간이다. 피와 살이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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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야간 산행을 하면서 어느정도 산길에 익숙해지면 손전등을 끈다. 때로는 순간적으로 온몸의 감각이 차단된 것 같은 공포감을 느끼기도 한다. 온통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으면 주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시야가 제한되는 그만큼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진다. 발걸음과 호흡이 조용히 가라 앉는다. 산속이 고요한 바닷속처럼 달빛 속에서 일렁인다. 바로 앞 어둠 속에서 무언가 숨쉬고 있는것 같은데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무섭고 매혹적이다. 온통 푸르고 투명한 그림자들만 가득하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불빛이 마치 별같다. 하늘과 땅이 뒤섞인채로 천지사방이 별뿐인것 같다. 


뤽 베송의 <그랑블루> 리마스터링 버전을 다시 봤다. 영화 속 바다는 기억처럼 푸르고 눈부시지 않았다. 차라리 청회색의 모노톤에 더 가깝다. 이 영화는 거대한 어둠에 관한 이야기다. 엔조는 죽어가면서 자크에게 '네 말이 맞았어. 저 아래가 이 위보다 더 좋더라'고 말한다. 자크는 조안나에게 '다이빙을 하다보면 저 아래에서 다시 이 위로 올라와야 할 이유를 찾는것이 제일 어려워'라고 말한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때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다시 보게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크는 결국 자신이 택한 어둠속으로 침참하는것을 택한다. 사람이 어둠을 이겨낼 수 있을까. 밤이면 환하게 주위를 밝혀도 어둠은 사라진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주위에서 끈질기고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다. 어둠은 이겨내거나 쫒아낼 수 없다. 이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자크가 더 깊은 심해로 내려갈 수록, 겹겹이 쌓인 푸른 바다가 결국 완벽하게 칠흙같은 어둠으로 변하는 것처럼, 어둠과 빛은 양립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한몸처럼 거기에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크는 사랑하는 연인마저도 버리고 바다밑 깊은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극단적인 선택, 극단적인 단절, 그는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선택함으로서 모든 세계를 파괴한다. 

 

우리는 완벽하게 혼자이면서 동시에 함께 살아간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둠과 빛 모두를 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불완전한 채로 삶이라는 완벽한 모순을 끌어안을 것을 요구 받는다. 그러나 자끄는 끊임없이 순수한 세계를 동경한다. 계속 물을 끼얹어 줘야 뭍위에서 살 수 있었던 돌고래처럼, 자끄는 사람들과 가까워질수록 더 깊은 어둠속으로 돌아간다. 그가 결국 바닷속 어둠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공감되지도 않고, 매혹되지도 않는다. <그랑블루>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움직였던 장면은 숨을 거둔 엔조가 푸른 어둠속으로 말없이 가라앉는 순간이다. 말없이, 눈물도 없이 죽음과 단절을 받아들이는 순간. 


어두운 산길이 익숙해질 때쯤 되면 하나둘 산아래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 빛, 이른 새벽 불켜진 창문들 밑을 지나다 보면 일찍 일어난 누군가의 밭은 기침소리, 아침 상의 그릇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죽은 듯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난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온다. 또다른 밤을 맞이하기 위해 하루를 다시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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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야구선수인 호창(임창정)은 대학 야구부의 말단 직원이다. 어느 날 그에게 중요한 임무가 맡겨진다. 전라남도 광주에 있다는 초 고교급 투수를 비밀리에 스카웃 해오는 것이다. 이 임무에는 야구부의 사활이 걸려있다. 라이벌 대학교와의 자존심 싸움에서 3 년 째 밀리고 있는 야구부 최후의 카드. 그가 바로 고등학생 선동렬이다. 억지로 떠밀려 내려간 광주에서 호창은 세영(엄지원)과 우연히 재회한다.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호창과 세영은 이소룡이 죽던 날 헤어진다. 호창은 세영의 일방적인 결별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스카우트>는 공적 기억으로서의 역사란 결국 무수히 많은 개인의 사적기억들이 오랜 시간 쌓여온 결과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의 기억은 명백한 물질성과 육체성을 지닌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에서 '천불이 난다'고 한다. 이때의 기억은 분명한 육체적 현상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호창의 잃어버린 기억은 뒤늦게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갑작스럽게 소환된다. 대학시절 호창과 야구부원이 부당해임 교수의 복직 농성 현장에 투입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유니폼에 붙어있는 등번호와 자신의 이름을 떼어낸 이들은 잔뜩 눌러쓴 모자의 익명성 뒤에 숨어 농성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어쩌면 이들의 '우발적이었던' 폭력은 1980년 광주의 시위 진압 현장에서 전경들을 통해 재현된다. 호창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행위를 망각 속에 묻었다.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운 행위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호창의 망각은 1980 년 광주를 통해서 비로소 기억의 형태로 명확하게 재구축된다. 몸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기억할 것이지만, 정신은 기억하기를 거부한다. 가해자였던 호창은 자신의 행위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기억에 의도적인 망각을 일으킨다. 물론 이것은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다. 망각은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작동한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실체를 직시하지 않기 위해 저도 모르게 눈을 가리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가해자가 된 인물들이 과거를 어떤 형태로든 기억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들에게 기억한다는 행위는 과거를 망각 속에 묻어두기 위한 중요한 기제로 작용된다. 지방대 교수 조은숙(문소리), 만화가 박 필/박석규(지진희), 불량배 박석호(조성하),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이 세 사람은 하나의 비밀을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동급생의 죽음이다. 장난처럼 시작된 수영장에서의 추격전은 갑작스러운 추락사로 중단된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일어나는, 누구도 제어가 불가능한 현상이다. 갑자기 비집고 들어오는 죽음의 순간은 보는 이들에게 죽음이라는 실체적 사건을 환기시킨다. 부조리극 같은 이 영화가 정색하고 진담을 건네는 기묘한 순간이다. 이들에게 죽음은 절대로 기억한다고 드러내서도 안되고, 발설해서도 안 되는 사건이다. 세 명 모두 가해자이면서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모두 살아가지만 더러는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견뎌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마치 과거의 희미한 그림자 같다. '결혼은 하고 사냐?'라는 박석호(조성하)에게서 멀어져가는 조은숙의 절룩거리는 왼쪽 다리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 맘대로 이탈하려드는 제어 불가능한 삶의 기관器官처럼 보인다.


운동선수들은 같은 동작을 익숙해 질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한다. 이것은 전경들도 마찬가지이다. <스카우트>의 후반부, 경찰서 진압장면에서 볼 수 있는 약속된 구령에 맞추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전경들의 움직임은 반복된 훈련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복 훈련의 목적은 머리로 판단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도록 신체를 교정하는 것이다. 일종의 반사신경 체계를 프로그래밍 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이성적 판단에서 기인하는 기억이라는 행위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그렇다면 기억하는 것은 피해자만의 몫인가? 적어도 <스카우트>에서는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한 때는 형이 되게 원망스러웠었는데, 다시 보니까, 그럭저럭 봐줄만 하네?'라는 세영의 말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오롯이 품어낼 수 있었던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존엄을 보여준다. 이는 같은 해에 개봉되었던 <화려한 휴가>가 동일한 주제인 광주민주화항쟁을 대중영화의 화법 속에서 비교적 안전한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던 것과는 여러모로 비교점을 가진다. 그러나 <스카우트>는 단순한 후일담, 또는 비극의 스펙터클에서 멈추지 않고 기억한다는 행위를 통해 보는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과거를 껴안을 것을 주문한다.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괴물투수 선동렬의 스카우트를 둘러싼 이전투구라는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서 광주라는 역사적 사실이 가지는 질감의 결은 더욱 풍부해진다. 이러한 <스카우트>의 전략은 기억이라는 행위가 지니는 가치를 1980년 광주라는 특수성을 넘어서 현재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대중적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기여한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이러한 기억이라는 보편적인 기제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학창시절의 조은숙과 염색과 교수 조은숙과의 연결고리는 희박하다. 조은숙의 절룩거리는 왼쪽 다리는 그녀를 기억해 내려는 인물들에게 '장애'로 작용된다. 박석규는 조은숙에게 '(절룩이는) 다리 때문에 못 알아 봤다'라고 말한다. 화장실 앞에서 박 필/박석규와 조은숙이 벌이는 탐색전은 마치 구애의 춤처럼 동물적이고 에로틱하다. 두 남녀의 몸짓은 암컷과 수컷으로서의 호기심과 의구심 사이를 비틀대며 넘나든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에서 불연속적 존재인 인간은 본능적으로 연속성에 대한 갈망이 있다고 했다. 존재의 연속성은 생식의 순간 획득 될 수 있는데, 이 때 필연적으로 생식은 '작은 죽음'을 초래한다. 바로 그 순간, 정자와 난자는 소멸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서 섹스와 죽음은 밀접하게 닿아있다. 중학교 시절의 사고는 은숙을 가운데에 둔 쟁탈전의 와중에 벌어진 것이다. 질투심에 못이긴 유선생은 음주 운전을 강행하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제어할 수 없는 수컷으로서의 욕망은 불현듯 찾아오는 죽음만큼이나 불가해한 것처럼 보인다. 은숙은 석호에게 '우리가 몇 명을 죽였는지 아느냐'며 힐난한다. 조은숙의 절룩이는 왼쪽 다리, 변형된 육체는 그녀를 알았던 다른 이들이 기억을 환기하는 것을 교란한다. 그러나 본인에게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게 만드는 매개체로서 기능할 것이다. 물론 영화는 그녀가 왜 다리를 절룩이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이상한 결락이 발생된다. 아무리 꼼꼼히 기억한다고 해도 메꿀 수 없는 무언가가 남는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김 PD(박원상)는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그녀를 보면서 '죽이지 않느냐'며 연신 감탄사를 연발한다. (사연을) 알 수 없는 대상에의 매혹에서 결국에는 죽음을 초래하는 에로스로의 연결. 그 중심에 기억과 망각의 장소로서의 육체가 놓여진다. 하지만 육체는 어떤것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를 말할 뿐이다. 이렇게 현재는 기억이 중첩된 장소,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지며 흔들리는 시간의 육체가 된다. 
 

2013. 6. 6. 최종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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