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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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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인간이다.

片/結 / 2013. 9. 14. 17:25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밝힌 상현은 태주의 집으로 찾아간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장면을 볼 수 있다. 아직은 상현이 뱀파이어라는것을 두려워하는 태주는 그에게서 도망가려고 한다. 도망가려는 태주를 상현은 화장실 한 구석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을 설득한다. 이때 화면 좌측의 거울엔 상현의 모습이 비춰진다. 뱀파이어는 그림자가 없고(또는 희미하고) 거울에 비춰지지 않는다. 이것은 뱀파이어 전설(장르)의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아마도, 뱀파이어는 인간과 다른 (어쩌면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거울에 모습이 비춰지지 않거나 그림자를 지니지 못하는 것일 것이다. - 어떤 전승에서는 뱀파이어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고, 거울에 비춰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질문을 다시 옮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장면에서 거울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누구인가 ? 그것은 상현이 아니라 태주다. 이 장면을 단순히 태주의 위치가 거울에 비춰질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왜 거울 속에 두 사람은 함께 비춰지지 않아야만 했을까? 왜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을 보아야만 했을까? 거울에 비춰진 상현은 누구(무엇)인가 ? 그리고 거울 바깥의 태주는 또 누구인가?

뱀파이어는 포식자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뱀파이어는 마치 여우가 닭을 잡아 먹듯 인간의 피를 마신다. 결코 희생물의 살을 취하지 않고 오로지 흡혈만한다. 피는 생명의 정수다. 그러므로 뱀파이어가 피를 빠는 것은 식욕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살고자 하는 격렬한 욕구, 갈증 thirst 이다. 그림자도 남지 않고, 거울에도 비춰질 수 없는, 죽어있는 자인 뱀파이어가 어떻게든 현재를 살아가려는 욕망, 지금 여기에 살아있기 위해, 두 눈을 멀게 할 정도로, 희생물의 생명을 찾아 내미는 두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격렬한 욕망이다. 

그렇다면, 상현은 정말로 '뱀파이어'인 것일까? 이 지점에서 박찬욱은 일종의 뱀파이어에 대한 존재론적 정의를 시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현이 거울에 비춰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행동이 인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현이 흔히 말하는 '휴머니즘'이 가득한 뱀파이어라고 오해는 하지 말자. 그는 여전히 뱀파이어다. 그런데 그는 인간처럼 행동한다. 뱀파이어의 위선. 인간의 위선. 이후에 뱀파이어가 된 태주는 상현의 이런 모습을 비웃는다. 포식자로서의 능력과 자격을 지녔으면서 그것을 낭비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거울 바깥의 태주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는 인간이었을까, 아니면 갈증에 가득찬 뱀파이어였을까. 이 영화의 마지막을 생각해 본다면,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다, 인간이다. 피와 살이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이다.' 



Posted by 느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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