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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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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다.

片/結 / 2013. 12. 29. 18:46

아침 일찍 일어났다. 빵 한조각과 뜨거운 음료를 보온병에 챙겨 넣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평소 꼽아 뒀던 조조 영화를 봤다. 극장 한 켠을 빌려 조그만 전시회가 걸려 있었다. 조그만 테이블 위에는 작가의 책도 판매되고 있었다. 작가가 여행을 다니면서 드로잉 한 그림들과 글을 모은 책이었다. 책의 첫 장의 문장은 "이곳이 싫었다"로 시작해서 "모든 걸 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진 것들이 낡고 더러워만 보여서 몽땅 버리고 새로 사고 싶지만, 나는 가난했다."로 끝났다. 스무살 무렵의 자기 연민과 자학이 가득 넘치다가 자기합리화로 끝나버리는 그런 책일 것 같아서 손이라도 데일 것처럼 피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림이 너무 좋았다. 형태를 따라 너울거리는 얇은 선들이 좋았다. 얼핏 장자크 상페를 닮은 그림이지만, 묘하게 마음을 끌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바로 극장을 떠나지 못하고 삼십분 넘게 서성였다. 결국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극장쪽에서는 작가님이 가지고 있는 책을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금만 받고, 모두 작가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기꺼이 현금을 지불했다. 아마도, 출판사에서는 쥐꼬리만큼도 안되는 선인세와 선심이라도 쓰듯 재고에 가까운 이 책들을 작가에게 떠넘겼을 것이다. 


이 책의 작가는 '이 곳이 싫어' 많은 것들을 버리고 떠났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책을 냈다. 어떤 이유로, 어떤 목적으로 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지불한 돈이 정말로 작가에게 돌아가는지도 나는 알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돈으로 밖에 누군가를 지지하고 응원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먹먹하다. 여행을 다녀온다고 세상이 변하거나 내가 변하지 않는다. 의외로 일상은 단단하고 완고하다. 책을 다 읽고 나니 하늘이 어둑해졌다. 눈발이 신산하게 흩날린다. 집에 돌아가 저녁을 해먹고 빨래를 해야겠다. 도시락으로 싸갈 찬거리를 준비하고 손발을 깨끗이 닦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일요일이 다 지나갔다. 짧은 휴가가 끝났다. 




Posted by 느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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