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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꿈이다. 꿈만 같다.

문경(김상경)은 꿈을 꾼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먹고 치우지 않은 그릇이 그대로다. 그는 꿈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난다. <밤과 낮>에서 하숙집 주인 장선생(기주봉)은 성남(김영호)에게 '옛날에 태어났으면 장군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하하>에서 통영 향토 역사관 관장, 그러니까 역시 똑같은 배우가 연기한 장관장은 문경에게 공식 영정이 아닌 '좀 더 토속적으로 묘사된' 이순신 장군의 영정 그림을 보며 아주 닮았다고 말한다. (배우 기주봉 씨는 여전히 안내인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중이다.) 그러니까, 문경은 이 모든 것들을 경유해서 꿈속의 이순신 장군을 만난다. 관객인 우리들은 <밤과낮>을 지나고 <하하하>에 이르러서야 '옛날에 태어났으면 장군감'이 될법한 성남이 정말로 이순신 장군이 된 모습을 만난다. 그런데 수염이며 갑옷이며 재연이라고 하기엔, 꿈이라 하기에도 너무 조악하다. 이 모든 것이 장난 같다. 그래도 문경은 장군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조아리며 눈물을 쏟는다. 문경은 이순신 장군에게 '좋은 것만 보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꿈에서 깨자마자 꿈속에서 들은 말들을 적으려고 하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이 말 뿐이다. (그런데 꿈속에서 겪고 들은 것을 기억한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장군은 꿈속에서 연습 삼아서 매일 한 편씩 시를 쓸 것을 제안한다. 문경은 정말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니 문경이 기억하는 것은 그가 알아채고 있는 것 보다 더 많다. 여하튼, 나는 일요일 치고는 일찍 일어난 아침에 이 글을 적고 있다. 꿈속의 이순신 장군 때문은 아니다. 문경의 주홍색 티셔츠가 어제 보았던 영화 <하하하>에 단단하게 눌러 붙어있는 인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같은 옷만 주구장창 입고 나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극장전>의 경수가 입고 다니던 오리털 패딩 점퍼는 홍상수 감독의 옷이라고 한다. 그의 영화는 하루, 또는 대략 일주일 내의 사건만을 다룬다. 그러니까 인물이 한 가지 옷만 입는다고 해서 크게 거슬릴 것이 아닐 텐데도, 나는 <하하하>에서 문경의 주홍색 티셔츠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이때 거슬린다고 하는 것은 불편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꾸 눈길을 끌어서 집중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는 의미다. 어쩌면 이 영화의 배경이 여름이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여름이면 하루 입은 속옷이며 티셔츠며 양말을 모조리 빨래통으로 던져 넣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 나로서는, 영화 속 통영은 비도 자주내리고, 기온이 높기 때문에 분명히 땀도 많이 흘리고 눅눅해 졌을 그 티셔츠를 보게 될 때마다, 마치 <극장전>의 남산타워처럼 굳이 보려들지 않아도 언제나 그곳에 있기 때문에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처럼 보였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그가 아주 뻔뻔하게 일상성을 들이밀고 있다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마치 문경의 꿈속에서 이순신 장군이 나뭇잎을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그러니까 모든 익숙한 것들에 대해 습관처럼 생각하기를 멈추고,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질문을 생각하고 답을 찾을 것을 요구하는 그의 태도 말이다. 그것은 그냥 나뭇잎 일진데, 굳이 '이것이 무엇'이냐며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그것에 의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당혹스럽다. 단순한 질문이 현실에 일으키는 균열의 족적들 같은 것이 홍상수의 영화인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에서 일상성은, 비일상성으로 연결되는 통로, 혹은 표지판 같은 것이다. 여하튼, 급기야 영화 중반쯤 넘어서자 티셔츠의 제대로 펴지지 않은 깃에 자꾸 눈길이 가면서 영화 속 시간대로라면 거의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몇 번 갈아입지 않은 옷에서 날법한, 눅진하고 두터운 홀애비 냄새가 아주 정직하고 실체적으로 코끝에서 맴돌 정도였다. 분명히 문경은 중간에 흰색 셔츠나 집에서 입는 티셔츠로 갈아입지만, 그냥 잠간 벗어놓고 빨지 않은 채로 다시 입었을 것처럼 보이는 후줄근한 주홍색 셔츠는 상큼한 여름 그 자체 같은 왕성옥(문소리)의 종아리와 짧은 머리와는 반대지점에 있는 무엇처럼 보인다. 여기엔 무언가 고여 있다. 무언가 변하지 않는 채로, '계속해서 끈질기게 고여 들고 있다' 는 이상하고 낯선, 그러나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감각이 있다. 




여행을 떠나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는 선배 성우와 함께 청평사를 찾아간다. 선착장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에서 두 남자는 회전문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한다. 문은 문이되, 들어설 수 없는 문인 회전문 전설을 이야기하던 두 남자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고 그냥 돌아 나온다. <하하하>에서 주인공 문경은 캐나다로 떠나기 전, 영화평론가인 선배 중식(유준상)과 청계산에 오른다. 이 과정은 올라가는 뒷모습과 내려오는 앞모습의 두 장의 스틸 컷으로 묘사된다. 아마도 두 남자는 청계산 정상까지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청계산 기슭 어디쯤에서 막걸리로 술판을 벌이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다. 홍상수의 영화 속 여행은 극점에서 극점으로 연결되는 운동이 아니라 대략 언저리 어디쯤에서 잠간 고였다가 다시 떠나가는, 구분이 거의 불가능한 이동, 단순하고 기능적인 자리바꿈이다. 이들은 여행지에서까지 떠나온 곳과 다를 것 없는, 어디에나 있는 공간들을 필사적으로 찾아 들어간다. 가령, 술집과 식당, 여관, 모텔 같은, 위상학적 지표, 지역적 특성들이 모조리 지워진 지점들을 전전한다. 이들은 그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면 인물들은 어디론가 떠날 수 만 있다면 정체된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죽는다. 정호(김강우)의 말처럼 삶에서 삶이라는 '이름'을 걷어낼 때, 그곳에서 '진짜'를 보게 될 것인데, 모든 것을 걷어낸 그 자리에 남는 것은 결국, 죽음이다.

나는 <하하하>를 보면서 여간해서 웃기 어려웠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보자마자 나는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현재는 흑백의 스틸사진 속에 고여 있고, 과거는 생동하는 이미지들로 보여진다. 그리고 '좋은 것만 이야기하자'고 다짐하고 시작하는데, 이 말은 꼭 게임의 룰을 정하는 것 같다. 고인(의 시간)을 모독하면 안 된다. 지나간 시간을 좋게 기억하자. '좋은 것만 보자'는 다짐은 좋은 대상만 보자는 것 보다는 좋은 '태도'로 보자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게라도, 지나간 삶을 긍정해야만 현재를 살 수 있다는 어렴풋한 다짐은 <극장전>에서 동수가 '생각을 하자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는 마지막 말과 겹쳐진다. 오로지 남겨지는 것, 기억 속에(서라도) 되살려 낼 수 있는 것은 과거일 뿐인데, 그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는 고여 있고, 정지된 채로 남겨졌거나, 죽어있다. <하하하>는 죽어있는 (자들의) 이미지와 목소리로 회상이 시작된다. 그러니 어떻게 웃을 수 있는가. 객석의 누군가 발을 구르며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린다. 마치 자신의 발밑에 정말로 단단한 땅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려고 구르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나는 좌석에 꼼짝없이 붙들린 채로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들이 정말은 죽어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람이냐, 동물이냐.

문경의 어머니는 그에게 '영생아파트'의 열쇠를 건네준다. 과연 어떤 건축업자가 이렇게 괴이쩍은 이름의 아파트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문경은 그 아파트가 꼭 '동굴'같다고 말한다.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들리는 이 말은 (아파트를 공짜로 주겠다는데 누가 마다할 것인가!) 본능적으로 문경이 이곳에서 어떤 위험을 감지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애초에 홍상수가 등장인물들의 죽음에서 출발해서 계속 한 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삶을 향해 계속해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영생과 비슷하다. 계속 되는 삶. 계속 해서 같은 것들만 반복되는 삶. 더 이상 선택을 할 수 없는 채로, 집도 없이 길 위에서 떠도는 삶. 홍상수의 영화 속 인물들, 그러니까 영화의 화자가 되는 인물들은 집이 있음에도 바깥으로 떠돌거나, 그들의 거처가 거의 묘사 되지 않는다. 이들은 애초에 '집에 들어가기 너무 싫어' 하는 인물들 같다. <생활의 발견>을 두고 집의 외부에서 내부로, 그러니까, 집이라는 자궁 속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욕망하는 경수의 여정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하하하> 역시 다르지 않다. 주인공들은 타인의 집(앞)에서 집(앞)으로 전전한다. 이 모든 문들은 단단히 닫혀있다. 반면에 여자들은 생각보다 쉽게 가랑이를 벌려준다. 그러나 남자가 원하는 대로 곧이 받아주지는 않는다. '재미 보았으니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거나 '젊으니까, 남자니까, 니들도 그러잖아'라며 당당히 면박을 주고 떠나간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향해, 그녀들의 자궁을 향해서 전속력으로 돌진하지만, 여자들이 열어주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그저 아랫도리 일 뿐이다. '생각을 해야 살 수 있다'고 말했던 <극장전>의 동수는 어쩌면 이 차이를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식이 큰아버지 앞에서 개처럼 절규했을 때, 그러니까 '이 여자라면 내가 지금보다 더 크게 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집은, 어머니는, 여자가 남자의 미래가 될 때, 남자는 동물이 아닌, 괴물이 아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꼭 문경의 아버지로 한정지우지 않더라도, 남자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여자를 자빠뜨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사람이냐, 동물이냐. 는 어쩌면 근본적인 문제가 남는다. 그렇다면 사람이 될 수 없을지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아주 오래된 결심을 다시 떠올려 볼 때, 그나마 괴물이라도 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일진데, 그렇다면 동물은 괴물이 아닌가? 문경은 어머니가 '하는 것 봐서' 줄 수도 있었던 집을 '동굴 같다'며 거부함으로써, 동물이 되기를 거부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 동굴 같은 집을 기꺼이 받아들인 정호는 이 동굴 같은 집에서 (마늘과 쑥으로 100일을 나고) 사람이 되어서 종국에는 '끝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고이다.

<하하하>에서 문경은 어떠한 사람인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이것은 배우 김상경이 등장한 <극장전>, <생활의 발견>에서도 거의 유사하다. 어린애처럼 대책 없는 덩치 커다란 이 남자의 속내는 겹겹이 가려져 있거나 쉽게 오인된다. 반면, 중식의 현재 상황은 비교적 자세히 그려진다. 그는 어찌 보면 <밤과낮>의 성남처럼 보인다. 그는 기혼남이고, 아내 몰래 만나는 애인이 있다. 그는 항상 웃지만, 우울증이 심해서 약을 복용한다. 문경의 웃음은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순간 제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무엇 같다. 자신이 굳이 '우울증이 있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는 이상하게 일그러진 사람처럼 보인다. 서울을 떠나온 이들이 머물고 있는 통영은 마치 이들이 천천히 흘러서 결국엔 고여 버린 장소 같다. 문경이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가려는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시켜주지 않아' 교수직에서 짤렸고, 영화도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금치산자에 가깝다. 어쩌면 더 이상 한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가 끝나도 우리는 문경이 정말로 캐나다로 떠났는지 확인 할 수 없다. 두 남자는 영화의 제목처럼 하하하! 하는 호쾌한 웃음을 던지며 퇴장한다. 또는 암전 속으로 사라진다. 그들이 행복한지 우울한지 우리들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영화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건 거의 위협에 가까운 피할 수 없는 진실의 도출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반복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삶은 계속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고이다가, 우리는 흘러서 또 다른 곳에서 고여들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삶은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엔 또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홍상수가 점점 체념 쪽으로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마도, 죽음이 있을 것인데, 과연 우리는 그 때, 홍상수의 영화에서 또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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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는) 올 때마다 얼른 떠나고 싶은 곳이오. 너무 산만하고 단절 되었지.” 마이클 만의 영화 <콜레트럴, Collateral>(2004)에서 빈센트는 이렇게 말한다. 빈센트의 대사는 도시 공간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상을 드러낸다. 그의 말처럼 도시는 산만하지만 동시에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도시의 단절성은 충돌의 전조이기도 하다. <콜레트럴>의 배경이 되는 미국과 다르게 거주지와 일터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 한국의 도시는 이러한 단절과 충돌의 뒤섞임이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창동의 <초록 물고기>(1997)는 재개발이 초래하는 가족의 해체를 느와르라는 장르적 틀을 빌어서 풀어낸다. 이 영화는 당시 일어났던 사회적 현상, 가령 신도시 개발과 그에 따르는 이권을 노린 세력들의 난입으로 인한 복마전을 영화의 청사진으로 삼는다. 도시의 확장은 전통적인 주거 공간을 해체하고 그 잔해를 도시 구획 내부로 편입한다. 이러한 편입은 상호 침투가 아닌, 일방적인 침탈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조직 보스 배태곤의 집요한 욕망은 도시라는 수직 공간의 속성과 닮아있다. 그것은 자기 복제되는 탐욕의 끊임없는 증식이다. 막동이는 배태곤의 신임을 얻음으로써 가족들과 함께 작은 음식점을 꾸려가는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한다. 그는 도시화로 인해 해체된 가족을 복원하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꿈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가족은 완벽하게 복원 될 수 없을 것이다. 망실되고 훼손 되어버린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이것은 순수와 비순수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변화는 필연적으로 낡음을 전제로 한다.

배태곤은 마치 신약의 악마처럼 막동이를 빌딩의 옥상으로 데려간다. 그는 재개발권을 따내기까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넌 꿈이 뭐냐?’라고 막동이에게 묻는다. 배태곤의 꿈과 막동이의 꿈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어두운 건물의 틈바구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막동이의 모습은 마치 도시의 아가리에 천천히 삼켜지는 것처럼 보인다. <초록 물고기>는 이제 막 장기가 생기고 뼈가 자라나기 시작하는 도시라는 거대하고 기괴한 생물이 탐욕스러운 몸집을 불려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괴물’이 아니라 ‘생물’이다.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 배태곤과 미애는 우연히 도시 외곽의 음식점에 들른다. 이곳은 마치 도시화라는 썰물에 외곽으로 떠밀려 버린 섬 처럼 보인다. 버드나무가 한가로이 흔들리는 이곳은 도시에서는 얻을 수 없는 안식이 있는 이상향 같다. 토종닭(이라고 주장하는) 닭 백숙을 맛있게 먹고난 배태곤과 미애는 적당히 만족을 찾은 평범한 부부처럼 보인다. 모든것이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막동이의 죽음이 폭력의 순환을 멈춘 것은 아니다. 잠시 유예 된 것이다. 희생양scape goat은 죄를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닥칠 위기를 잠시 뒤로 미뤄둔다. 결국 희생양은 위기를 지속시킴으로서 공동체를 더욱 견고히 한다. 애초에 감독은 막동이의 가족이 배태곤에게 복수하는 장면을 찍었지만 최종 편집에서는 제외 했다고 한다. 막동이 다음이 배태곤이 될 수도 있고, 미애가 될 수도 있다. 다음 술래가 당신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불신하고 두려워 하는것이 당연시 되는 풍경. 심지어는 목숨까지 앗아버리는 세계. 그것이 이창동이 <초록 물고기>에서 바라본 도시다. 


이수연 감독의 데뷔작 <4 인용 식탁>(2003)은 도시가 가지는 배타성의 근원을 급격한 근대화에서 찾는다. 도시라는 근대화의 산물은 수직적, 선형적 사고원리를 자양분으로 삼는다. 이 영화는 근대와 전근대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충돌이 벌어지는 무대로 아파트촌이 밀집된 신도시를 선택한다. 6 년 뒤에 만들어진 이용주 감독의 2009 년 데뷔작 <불신지옥>이 기독교신앙과 무속신앙의 충돌이 일어나는 주된 배경으로 (여전히) 아파트 단지를 설정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원은 어린 시절 신통력이 있다는 오해를 받아 학교도 가지 못하고 감금된 채로 가짜 부적을 써 주는 것으로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착취당한다. 그는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개척교회 목사에게 입양된다. 정원은 입양(adopted) 됨으로써 기독교/근대의 선형적 세계관을 이식(adapt) 받는다. 현재가 과거라는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그 쌓인 두께 만큼 망각의 거리는 멀어진다. 이 거리가 멀어질 수록 현재는 단단하고 안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결혼을 앞둔 정원은 어느 날 이상한 것들을 보기 시작한다. 죽은 아이가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 정확한 계획에 의해 세워지고 구획된 합리적 주거 공간인 아파트에 나타서는 안 되는,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전근대의 흔적들은 억압된 유령의 모습으로 출몰한다. 친족 살해를 저지른 정원과 죽은 어미를 마시고 살아남은 문정숙에게 과거는 단단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두 사람은 죽음이 매개하는 폭력을 통해 '생존' 했다는 비슷한 과거를 공유한다. 연은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본다. 또는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보여준 대가는 연에게 톡톡히 돌아온다. 남편은 그녀를 신경 쇠약으로 몰아붙인다. 연에게 호의를 가졌던 정원도 연으로 인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이 되살아나자 그녀를 거부하고 부정한다.‘사람들은 감당할 수 있는 것만 믿어요.’ 정원은 연에게 ‘당신 미쳤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어야 하는 합리적 세계 속에서 연의 예외적인 능력은 비이성적 사고의 산물, 유령의 복화술이다. 정원이 연을 끝까지 믿을 수 있었다면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간 시간은 한 번에 넘기기 힘들 정도로 뜨겁고 뻐근하다. 뜨거운 음식을 넘길 수 있을 때 정원은 한 가정의 가장이, 통과의례를 거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영화는 남기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의 4인용 식탁 맞은편에서 ‘맛있어요?’ 라고 묻는 연에게 ‘아직 뜨거워요’라고 말하는 정원의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떠나간 약혼자에게 ‘우리 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메시지를 남긴다.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놓아 버린 채 아무도 찾지 않는 아파트에 남아있는 그의 모습은 희미한 유령처럼 보인다. 이 도저한 비관이 묻어나는 마지막은 그 전의 어떤 한국 영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감독은 영화 속 연이 그랬던 것처럼,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입 바깥으로 쉽사리 내놓지 않았던 주제를 건드린다.

도시는 과거와 이제까지의 모든 것들로부터의 익숙하고 당연한 관계를 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도시는 폭력적인 단절의 결과물이다. 망각은 도시의 주거권을 얻기 위한 대가다. 도시화는 원래 있던 집과 밭과 논과 산을 모조리 밀어버리고 그 위에 콘크리트와 철골로 만들어진 덮개를 덮어버린다. 그러나 기억의 힘은 강하다. 과거를 아무리 덮어버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더라도 일그러진 벽면에 울렁거리는 그림자처럼, 과거는 불현듯 어슬렁거리며 출몰한다. <초록 물고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식사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온 미애는 지금 이 곳이 막동이가 보여준 사진 속의 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운전석으로 도망친 만삭의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주문을 읊는다. 막동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던 바로 그 밤의 주문이다. 어두운 밤의 기억이 밝은 대낮에, 그것도 전혀 다른 공간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두려움에 떠는 미애가 기대는 것은 도시가 거부해 왔던 비이성적인 주술의 언어다. 공교롭게도, <초록 물고기>와 <4인용 식탁>은 죄의식의 형태로라도 과거를 껴안을 수 있는 능력이 여성, 혹은 여성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창동, 이수연, 두 감독의 데뷔작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다. 남성에게 그런 능력이나 성향이 있는 경우 정원처럼 미치거나 막동이처럼 죽음을 맞이한다. 도시는 여성성 혹은 전근대성의 거세를 요구한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도시 바깥으로 떠돌거나 도시의 최하층에 머물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예외는 없다. 프리츠 랑의 <메트로 폴리스>에서 묘사된 도시 빈민의 모습은 더 이상 세기말적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이다. 도시 공간에 대한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전망은 본격적인 도시화와 함께 태어난 쌍둥이의 또 다른,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얼굴이다. 연결 고리를 찾기 힘든 두 감독이 자신의 데뷔작에서 공통적으로 신도시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에 대한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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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낯선 나라다
- 부재不在를 응시하는 것


과거는 낯설다. 과거는 기억 속에, 지나간 시간 속에, 우리가, 당신이 이미 겪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과거는 지나간 기억과 시간과 공간 속에 있었던 것이다. 과거는 ‘과거형’으로만 존재한다. 과거가 여기, 지금, 현재의 시간 속에 꺼내어 질 때, 과거는 미화되거나 누군가의 추억담처럼 낯선 것이 되어 버린다. “정말로 그랬었나요? 그 기억은 정확한가요? 그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보고 있었지요? 당신은 어떤 말을 했었죠? 그 때 당신의 곁에는 누가 있었죠? 그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나요? 그 사람의 이름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영화란 존재할 수 없다. 객관적인 척을 하는, 객관성을 흉내 내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한 영화들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 왔다. 영화는 결국 관객과 만든이가 공모하는, 기꺼운 속임수다. 영화의 태생적인 한계는 주관성을 피해갈 수 없다. 영화는 만드는 이, 그것을 바라보는 이 모두에게 있어 시선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가급적 객관적으로 가감 없이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가급적’ 이라는 것에 주의하자. 위에도 적었지만, ‘철저하게 객관적인 영화란 존재할 수 없다’. 다큐멘터리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의 기록을 보여주고, 보여주기를 통해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그렇다면 소박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만약에 무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다큐멘터리는 성립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고 감독은 대답한다. 무언가 찍어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주제가 되는 것이 이제는 없다. 객관적 사료나, 신문기사, 뉴스 영상,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대로를 찍어서 보여주는 것이다. 또는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명성, 그 6일의 기록>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계속되는 농성과 공권력의 압박으로 피로에 지친 시위 참가자들이 벌였던 논쟁과 의견대립을 다루고 있는 한 장면에서, 감독은 당시 논쟁이 벌어졌던 (곳으로 추정되는) 조그만 소성당 내부를 보여준다. 성당 내부에는 아무도 없다. 이 장면은 후일의 증언과 대담으로 재구성된 장면이다. 아무도 없는 성당 내부. 그 위로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는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성우들에 의해 재연된 것이다. 당시를 기록한 영상이나 음성자료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동원 감독은 부재를 재연再演함으로서 당시를 재현再現 해낸다.


<과거는 낮선 나라다>는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산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다. 두 ‘열사’의 죽음을 의롭고 영예롭게 포장하지도 않으며,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았던 군사정권의 치졸함과 추악함을 고발하지 않는다. 이것은 감독의 관심사가 아니다. 심지어 당시 시위의 쟁점이었던 대학생 전방 입소 교육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이다. 카메라의 주요한 시선은 1986년의 죽음 이후로 계속되어온 남아있는 자들의 시간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난 이야기는 이제 그만, 지금 부터는 살아 있는 자들의 이야기 시작.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86년 4월 28일, 신림사거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방입소 반대 시위에서 분신한 故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20주년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당시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사건은 일간지에 아주 작은 쪽기사 정도로 다뤄졌다.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혹은 그럴 수 없었다. 군사정권이 언론과 국민의 입과 귀를 꼭꼭 틀어막았다. 그저 겸손하게 눈을 내리깔고 주어진 삶에 꾸역꾸역 만족하는 척하며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였다. 국가는 아버지였고, 성전이었고, 말씀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을 통해 존재 하게 된다. 그 누구도, 혹은 아무것도 그 죽음을 기억 할 수 있는 것이 남지 않게 될 때, 그 죽음은 부재하는 죽음, 존재하지 않았던 죽음이 된다. 그러므로 묘석은 부재의 증명이며, 죽음의 현존이다. 죽은 자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렇게 남겨진 기억들은 종종 고통스럽다. 그들이 기억하는 자들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이제껏 그래왔듯 삶은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단순하고 명징한 깨달음. 이 둔중하고 날카로운 生의 감각들.


카메라 앞에는 당시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죽은 자들과 직접,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물들이 있다. 그리고 카메라 뒤에는 감독이 있다. 그는 질문한다. 질문은 단답형이다. 그때를 기억하나요? 기억은 정확한가요? 정확하게 몇 시쯤이었어요? 정말 그렇게 기억하고 있나요? 그때 당신은 어디 있었죠? 왜 그런 생각을 했죠? 그 생각을 정말로 그 때 했었나요? 아니면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인가요? 그 말은 누가 했죠? 정말로 당신이 한 말이 맞나요, 아니면 그때 다른 누군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 말을 했던 사람은 누구죠?


이 집요한 목소리, 위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질문들은 의도적으로 당시의 기억을 불러낸다. 인물들은 화창한 대낮의 배경을 뒤로하고 앉아 있지만, 우리는 인물들이 마치 취조실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경험한다.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로 찍혀진 인터뷰 장면들은 소리와 보이는 것의 몽타쥬를 통해 플래시 백 한 번 없이 당시의 공기를 바로 지금 여기, 관객 앞에 꺼내 놓는다. 증언 할 것을, 기억해 낼 것을 담담하고 차갑게 재촉하는 질문들은 80년대 취조실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후반 작업을 통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차가운 감독의 목소리는 취조실 바깥의 어둠 속, 멀리 과거에서 다시 올라온 것처럼 들린다. 만약 당신이 이 목소리가, 이 기괴한 인터뷰를 섬뜩하게 느꼈던 단 한 순간이라도 있었다면, 이러한 과거의 목소리의 근원이 현재에서도 그 힘이 여전하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기 때문이다. 이때 관객은 화면 속 인물들이 존재하는 공간 바깥에 철저하게 방치된다. 이 자리는 개입이 용납되지 않으며 동시에 안전하다. 구경꾼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이 충돌될 때, 이 충돌을 통해 드러나는 과거는 (이미) 사라진 것이 아니다. 현재는 과거의 지속이다. 혹은 과거는 현재의 지속이다. 그런데.


기억은 공유될 수 없다. 기억이 초래하는 감정 역시 그러하다. 당사자가 아닌 이에게 타인의 기억은 그저 이야기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개인의 기억은 공공의 것이 될 수 없다. 물론 연민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연민은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연민은 종종 상상력이 풍부한 이에게 더 많이 허락된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때, 혹은 상상할 수 있을 때, 미약하게나마 연민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렇다면 이 가능성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적어도 이 질문에 영화는 어느 쪽으로도 대답을 준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과거는 낯선 나라다>가 (너무도 당연하게) 취하는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이다.


개인적 감정의 개입 없이 철저하게 객관적 팩트들만을 말할 것을 재촉하는 감독의 질문은 인터뷰이들의 증언들을 통해 관객들을 당시의 현장 속으로, 그 시간을 겪었던 이들이 숨 쉬고 움직였던 공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동시에 관객의 감정적 접촉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관객에게 인터뷰이들의 경험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어렴풋이 감지될 수도 있었던 순간, 바로 그 앞에서 영화는 한 발 뒤로 슬쩍 물러난다. 혹은 밀어낸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차갑고 잔인하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타인과 타인 사이의 이해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가 몹시 차갑고 냉정하며 잔인한 영화라는 지적에 감독은 수긍했다.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크린과 관객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또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다루었던 다른 영화들이 거짓말이라고, 그것은 위선일 뿐이라고 시비를 걸지도 않는다. 부재와 침묵은 이 영화가 선택한 정당한 방법과 언어일 뿐이다. 만약에 분신한 두 사람에 대해 남겨진 자료들이 존재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면, 이 영화를 다루는 방식은 달라졌을 것이다. 애초에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 부재에 대한 명징한 인식에서 출발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지어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흔히 이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여 질 수 없다. 그러니 그냥 방치하라, 혹은 잊어버려라’ 는 식으로 통용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적어도 이 영화의 자장 안에서는. 이 영화의 반 이상이 인터뷰이 들의 ‘말’로 채워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수많은 질문과 대답은 거의 속사포처럼 쏟아진다. ‘당시 사건에 대한 아무런 공식적 자료도 남아 있지 않았다.’라는 감독의 말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정보량은 엄청나다. 이것은 마치 기억의 낱장 카드들을 있는대로 늘어놓고, 그중에 적합한 것을 찾아내려는 끊임 없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말하여질 수 없는’ 과거를 적극적으로 말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가장 안전하게 받아들이는 말의 체계와 그로 인해 형성된 현재의 기억들과 시간들, 그 중심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정당한 말, 정당한 기억의 형태를 찾아냄으로써, 안락한 현재 위에 편리하게 오도된 침묵과 망각속에 방치되어 있던 시간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애도행위이다. 애도는 죽은 자를 그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 말하라. 죽은자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과거는 낯선 나라다 (2007)
감독 : 김응수




2009. 8. 1.




Posted by 느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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