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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3.01 <하하하> -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고이다.


꿈. 꿈이다. 꿈만 같다.

문경(김상경)은 꿈을 꾼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먹고 치우지 않은 그릇이 그대로다. 그는 꿈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난다. <밤과 낮>에서 하숙집 주인 장선생(기주봉)은 성남(김영호)에게 '옛날에 태어났으면 장군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하하>에서 통영 향토 역사관 관장, 그러니까 역시 똑같은 배우가 연기한 장관장은 문경에게 공식 영정이 아닌 '좀 더 토속적으로 묘사된' 이순신 장군의 영정 그림을 보며 아주 닮았다고 말한다. (배우 기주봉 씨는 여전히 안내인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중이다.) 그러니까, 문경은 이 모든 것들을 경유해서 꿈속의 이순신 장군을 만난다. 관객인 우리들은 <밤과낮>을 지나고 <하하하>에 이르러서야 '옛날에 태어났으면 장군감'이 될법한 성남이 정말로 이순신 장군이 된 모습을 만난다. 그런데 수염이며 갑옷이며 재연이라고 하기엔, 꿈이라 하기에도 너무 조악하다. 이 모든 것이 장난 같다. 그래도 문경은 장군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조아리며 눈물을 쏟는다. 문경은 이순신 장군에게 '좋은 것만 보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꿈에서 깨자마자 꿈속에서 들은 말들을 적으려고 하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이 말 뿐이다. (그런데 꿈속에서 겪고 들은 것을 기억한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장군은 꿈속에서 연습 삼아서 매일 한 편씩 시를 쓸 것을 제안한다. 문경은 정말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니 문경이 기억하는 것은 그가 알아채고 있는 것 보다 더 많다. 여하튼, 나는 일요일 치고는 일찍 일어난 아침에 이 글을 적고 있다. 꿈속의 이순신 장군 때문은 아니다. 문경의 주홍색 티셔츠가 어제 보았던 영화 <하하하>에 단단하게 눌러 붙어있는 인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같은 옷만 주구장창 입고 나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극장전>의 경수가 입고 다니던 오리털 패딩 점퍼는 홍상수 감독의 옷이라고 한다. 그의 영화는 하루, 또는 대략 일주일 내의 사건만을 다룬다. 그러니까 인물이 한 가지 옷만 입는다고 해서 크게 거슬릴 것이 아닐 텐데도, 나는 <하하하>에서 문경의 주홍색 티셔츠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이때 거슬린다고 하는 것은 불편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꾸 눈길을 끌어서 집중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는 의미다. 어쩌면 이 영화의 배경이 여름이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여름이면 하루 입은 속옷이며 티셔츠며 양말을 모조리 빨래통으로 던져 넣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 나로서는, 영화 속 통영은 비도 자주내리고, 기온이 높기 때문에 분명히 땀도 많이 흘리고 눅눅해 졌을 그 티셔츠를 보게 될 때마다, 마치 <극장전>의 남산타워처럼 굳이 보려들지 않아도 언제나 그곳에 있기 때문에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처럼 보였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그가 아주 뻔뻔하게 일상성을 들이밀고 있다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마치 문경의 꿈속에서 이순신 장군이 나뭇잎을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그러니까 모든 익숙한 것들에 대해 습관처럼 생각하기를 멈추고,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질문을 생각하고 답을 찾을 것을 요구하는 그의 태도 말이다. 그것은 그냥 나뭇잎 일진데, 굳이 '이것이 무엇'이냐며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그것에 의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당혹스럽다. 단순한 질문이 현실에 일으키는 균열의 족적들 같은 것이 홍상수의 영화인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에서 일상성은, 비일상성으로 연결되는 통로, 혹은 표지판 같은 것이다. 여하튼, 급기야 영화 중반쯤 넘어서자 티셔츠의 제대로 펴지지 않은 깃에 자꾸 눈길이 가면서 영화 속 시간대로라면 거의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몇 번 갈아입지 않은 옷에서 날법한, 눅진하고 두터운 홀애비 냄새가 아주 정직하고 실체적으로 코끝에서 맴돌 정도였다. 분명히 문경은 중간에 흰색 셔츠나 집에서 입는 티셔츠로 갈아입지만, 그냥 잠간 벗어놓고 빨지 않은 채로 다시 입었을 것처럼 보이는 후줄근한 주홍색 셔츠는 상큼한 여름 그 자체 같은 왕성옥(문소리)의 종아리와 짧은 머리와는 반대지점에 있는 무엇처럼 보인다. 여기엔 무언가 고여 있다. 무언가 변하지 않는 채로, '계속해서 끈질기게 고여 들고 있다' 는 이상하고 낯선, 그러나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감각이 있다. 




여행을 떠나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는 선배 성우와 함께 청평사를 찾아간다. 선착장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에서 두 남자는 회전문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한다. 문은 문이되, 들어설 수 없는 문인 회전문 전설을 이야기하던 두 남자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고 그냥 돌아 나온다. <하하하>에서 주인공 문경은 캐나다로 떠나기 전, 영화평론가인 선배 중식(유준상)과 청계산에 오른다. 이 과정은 올라가는 뒷모습과 내려오는 앞모습의 두 장의 스틸 컷으로 묘사된다. 아마도 두 남자는 청계산 정상까지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청계산 기슭 어디쯤에서 막걸리로 술판을 벌이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다. 홍상수의 영화 속 여행은 극점에서 극점으로 연결되는 운동이 아니라 대략 언저리 어디쯤에서 잠간 고였다가 다시 떠나가는, 구분이 거의 불가능한 이동, 단순하고 기능적인 자리바꿈이다. 이들은 여행지에서까지 떠나온 곳과 다를 것 없는, 어디에나 있는 공간들을 필사적으로 찾아 들어간다. 가령, 술집과 식당, 여관, 모텔 같은, 위상학적 지표, 지역적 특성들이 모조리 지워진 지점들을 전전한다. 이들은 그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면 인물들은 어디론가 떠날 수 만 있다면 정체된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죽는다. 정호(김강우)의 말처럼 삶에서 삶이라는 '이름'을 걷어낼 때, 그곳에서 '진짜'를 보게 될 것인데, 모든 것을 걷어낸 그 자리에 남는 것은 결국, 죽음이다.

나는 <하하하>를 보면서 여간해서 웃기 어려웠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보자마자 나는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현재는 흑백의 스틸사진 속에 고여 있고, 과거는 생동하는 이미지들로 보여진다. 그리고 '좋은 것만 이야기하자'고 다짐하고 시작하는데, 이 말은 꼭 게임의 룰을 정하는 것 같다. 고인(의 시간)을 모독하면 안 된다. 지나간 시간을 좋게 기억하자. '좋은 것만 보자'는 다짐은 좋은 대상만 보자는 것 보다는 좋은 '태도'로 보자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게라도, 지나간 삶을 긍정해야만 현재를 살 수 있다는 어렴풋한 다짐은 <극장전>에서 동수가 '생각을 하자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는 마지막 말과 겹쳐진다. 오로지 남겨지는 것, 기억 속에(서라도) 되살려 낼 수 있는 것은 과거일 뿐인데, 그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는 고여 있고, 정지된 채로 남겨졌거나, 죽어있다. <하하하>는 죽어있는 (자들의) 이미지와 목소리로 회상이 시작된다. 그러니 어떻게 웃을 수 있는가. 객석의 누군가 발을 구르며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린다. 마치 자신의 발밑에 정말로 단단한 땅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려고 구르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나는 좌석에 꼼짝없이 붙들린 채로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들이 정말은 죽어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람이냐, 동물이냐.

문경의 어머니는 그에게 '영생아파트'의 열쇠를 건네준다. 과연 어떤 건축업자가 이렇게 괴이쩍은 이름의 아파트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문경은 그 아파트가 꼭 '동굴'같다고 말한다.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들리는 이 말은 (아파트를 공짜로 주겠다는데 누가 마다할 것인가!) 본능적으로 문경이 이곳에서 어떤 위험을 감지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애초에 홍상수가 등장인물들의 죽음에서 출발해서 계속 한 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삶을 향해 계속해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영생과 비슷하다. 계속 되는 삶. 계속 해서 같은 것들만 반복되는 삶. 더 이상 선택을 할 수 없는 채로, 집도 없이 길 위에서 떠도는 삶. 홍상수의 영화 속 인물들, 그러니까 영화의 화자가 되는 인물들은 집이 있음에도 바깥으로 떠돌거나, 그들의 거처가 거의 묘사 되지 않는다. 이들은 애초에 '집에 들어가기 너무 싫어' 하는 인물들 같다. <생활의 발견>을 두고 집의 외부에서 내부로, 그러니까, 집이라는 자궁 속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욕망하는 경수의 여정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하하하> 역시 다르지 않다. 주인공들은 타인의 집(앞)에서 집(앞)으로 전전한다. 이 모든 문들은 단단히 닫혀있다. 반면에 여자들은 생각보다 쉽게 가랑이를 벌려준다. 그러나 남자가 원하는 대로 곧이 받아주지는 않는다. '재미 보았으니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거나 '젊으니까, 남자니까, 니들도 그러잖아'라며 당당히 면박을 주고 떠나간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향해, 그녀들의 자궁을 향해서 전속력으로 돌진하지만, 여자들이 열어주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그저 아랫도리 일 뿐이다. '생각을 해야 살 수 있다'고 말했던 <극장전>의 동수는 어쩌면 이 차이를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식이 큰아버지 앞에서 개처럼 절규했을 때, 그러니까 '이 여자라면 내가 지금보다 더 크게 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집은, 어머니는, 여자가 남자의 미래가 될 때, 남자는 동물이 아닌, 괴물이 아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꼭 문경의 아버지로 한정지우지 않더라도, 남자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여자를 자빠뜨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사람이냐, 동물이냐. 는 어쩌면 근본적인 문제가 남는다. 그렇다면 사람이 될 수 없을지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아주 오래된 결심을 다시 떠올려 볼 때, 그나마 괴물이라도 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일진데, 그렇다면 동물은 괴물이 아닌가? 문경은 어머니가 '하는 것 봐서' 줄 수도 있었던 집을 '동굴 같다'며 거부함으로써, 동물이 되기를 거부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 동굴 같은 집을 기꺼이 받아들인 정호는 이 동굴 같은 집에서 (마늘과 쑥으로 100일을 나고) 사람이 되어서 종국에는 '끝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고이다.

<하하하>에서 문경은 어떠한 사람인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이것은 배우 김상경이 등장한 <극장전>, <생활의 발견>에서도 거의 유사하다. 어린애처럼 대책 없는 덩치 커다란 이 남자의 속내는 겹겹이 가려져 있거나 쉽게 오인된다. 반면, 중식의 현재 상황은 비교적 자세히 그려진다. 그는 어찌 보면 <밤과낮>의 성남처럼 보인다. 그는 기혼남이고, 아내 몰래 만나는 애인이 있다. 그는 항상 웃지만, 우울증이 심해서 약을 복용한다. 문경의 웃음은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순간 제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무엇 같다. 자신이 굳이 '우울증이 있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는 이상하게 일그러진 사람처럼 보인다. 서울을 떠나온 이들이 머물고 있는 통영은 마치 이들이 천천히 흘러서 결국엔 고여 버린 장소 같다. 문경이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가려는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시켜주지 않아' 교수직에서 짤렸고, 영화도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금치산자에 가깝다. 어쩌면 더 이상 한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가 끝나도 우리는 문경이 정말로 캐나다로 떠났는지 확인 할 수 없다. 두 남자는 영화의 제목처럼 하하하! 하는 호쾌한 웃음을 던지며 퇴장한다. 또는 암전 속으로 사라진다. 그들이 행복한지 우울한지 우리들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영화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건 거의 위협에 가까운 피할 수 없는 진실의 도출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반복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삶은 계속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고이다가, 우리는 흘러서 또 다른 곳에서 고여들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삶은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 다음엔 또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홍상수가 점점 체념 쪽으로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마도, 죽음이 있을 것인데, 과연 우리는 그 때, 홍상수의 영화에서 또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Posted by 느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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