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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6.06 육체: 망각과 기억의 장소
  2. 2012.12.23 두 개의 도시, 두 개의 데뷔작



전직 야구선수인 호창(임창정)은 대학 야구부의 말단 직원이다. 어느 날 그에게 중요한 임무가 맡겨진다. 전라남도 광주에 있다는 초 고교급 투수를 비밀리에 스카웃 해오는 것이다. 이 임무에는 야구부의 사활이 걸려있다. 라이벌 대학교와의 자존심 싸움에서 3 년 째 밀리고 있는 야구부 최후의 카드. 그가 바로 고등학생 선동렬이다. 억지로 떠밀려 내려간 광주에서 호창은 세영(엄지원)과 우연히 재회한다.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호창과 세영은 이소룡이 죽던 날 헤어진다. 호창은 세영의 일방적인 결별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스카우트>는 공적 기억으로서의 역사란 결국 무수히 많은 개인의 사적기억들이 오랜 시간 쌓여온 결과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의 기억은 명백한 물질성과 육체성을 지닌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에서 '천불이 난다'고 한다. 이때의 기억은 분명한 육체적 현상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호창의 잃어버린 기억은 뒤늦게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갑작스럽게 소환된다. 대학시절 호창과 야구부원이 부당해임 교수의 복직 농성 현장에 투입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유니폼에 붙어있는 등번호와 자신의 이름을 떼어낸 이들은 잔뜩 눌러쓴 모자의 익명성 뒤에 숨어 농성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어쩌면 이들의 '우발적이었던' 폭력은 1980년 광주의 시위 진압 현장에서 전경들을 통해 재현된다. 호창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행위를 망각 속에 묻었다.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운 행위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호창의 망각은 1980 년 광주를 통해서 비로소 기억의 형태로 명확하게 재구축된다. 몸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기억할 것이지만, 정신은 기억하기를 거부한다. 가해자였던 호창은 자신의 행위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기억에 의도적인 망각을 일으킨다. 물론 이것은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다. 망각은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작동한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실체를 직시하지 않기 위해 저도 모르게 눈을 가리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가해자가 된 인물들이 과거를 어떤 형태로든 기억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들에게 기억한다는 행위는 과거를 망각 속에 묻어두기 위한 중요한 기제로 작용된다. 지방대 교수 조은숙(문소리), 만화가 박 필/박석규(지진희), 불량배 박석호(조성하),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이 세 사람은 하나의 비밀을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동급생의 죽음이다. 장난처럼 시작된 수영장에서의 추격전은 갑작스러운 추락사로 중단된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일어나는, 누구도 제어가 불가능한 현상이다. 갑자기 비집고 들어오는 죽음의 순간은 보는 이들에게 죽음이라는 실체적 사건을 환기시킨다. 부조리극 같은 이 영화가 정색하고 진담을 건네는 기묘한 순간이다. 이들에게 죽음은 절대로 기억한다고 드러내서도 안되고, 발설해서도 안 되는 사건이다. 세 명 모두 가해자이면서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모두 살아가지만 더러는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견뎌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마치 과거의 희미한 그림자 같다. '결혼은 하고 사냐?'라는 박석호(조성하)에게서 멀어져가는 조은숙의 절룩거리는 왼쪽 다리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 맘대로 이탈하려드는 제어 불가능한 삶의 기관器官처럼 보인다.


운동선수들은 같은 동작을 익숙해 질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한다. 이것은 전경들도 마찬가지이다. <스카우트>의 후반부, 경찰서 진압장면에서 볼 수 있는 약속된 구령에 맞추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전경들의 움직임은 반복된 훈련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복 훈련의 목적은 머리로 판단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도록 신체를 교정하는 것이다. 일종의 반사신경 체계를 프로그래밍 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이성적 판단에서 기인하는 기억이라는 행위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그렇다면 기억하는 것은 피해자만의 몫인가? 적어도 <스카우트>에서는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한 때는 형이 되게 원망스러웠었는데, 다시 보니까, 그럭저럭 봐줄만 하네?'라는 세영의 말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오롯이 품어낼 수 있었던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존엄을 보여준다. 이는 같은 해에 개봉되었던 <화려한 휴가>가 동일한 주제인 광주민주화항쟁을 대중영화의 화법 속에서 비교적 안전한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던 것과는 여러모로 비교점을 가진다. 그러나 <스카우트>는 단순한 후일담, 또는 비극의 스펙터클에서 멈추지 않고 기억한다는 행위를 통해 보는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과거를 껴안을 것을 주문한다.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괴물투수 선동렬의 스카우트를 둘러싼 이전투구라는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서 광주라는 역사적 사실이 가지는 질감의 결은 더욱 풍부해진다. 이러한 <스카우트>의 전략은 기억이라는 행위가 지니는 가치를 1980년 광주라는 특수성을 넘어서 현재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대중적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기여한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이러한 기억이라는 보편적인 기제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학창시절의 조은숙과 염색과 교수 조은숙과의 연결고리는 희박하다. 조은숙의 절룩거리는 왼쪽 다리는 그녀를 기억해 내려는 인물들에게 '장애'로 작용된다. 박석규는 조은숙에게 '(절룩이는) 다리 때문에 못 알아 봤다'라고 말한다. 화장실 앞에서 박 필/박석규와 조은숙이 벌이는 탐색전은 마치 구애의 춤처럼 동물적이고 에로틱하다. 두 남녀의 몸짓은 암컷과 수컷으로서의 호기심과 의구심 사이를 비틀대며 넘나든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에서 불연속적 존재인 인간은 본능적으로 연속성에 대한 갈망이 있다고 했다. 존재의 연속성은 생식의 순간 획득 될 수 있는데, 이 때 필연적으로 생식은 '작은 죽음'을 초래한다. 바로 그 순간, 정자와 난자는 소멸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서 섹스와 죽음은 밀접하게 닿아있다. 중학교 시절의 사고는 은숙을 가운데에 둔 쟁탈전의 와중에 벌어진 것이다. 질투심에 못이긴 유선생은 음주 운전을 강행하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제어할 수 없는 수컷으로서의 욕망은 불현듯 찾아오는 죽음만큼이나 불가해한 것처럼 보인다. 은숙은 석호에게 '우리가 몇 명을 죽였는지 아느냐'며 힐난한다. 조은숙의 절룩이는 왼쪽 다리, 변형된 육체는 그녀를 알았던 다른 이들이 기억을 환기하는 것을 교란한다. 그러나 본인에게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게 만드는 매개체로서 기능할 것이다. 물론 영화는 그녀가 왜 다리를 절룩이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이상한 결락이 발생된다. 아무리 꼼꼼히 기억한다고 해도 메꿀 수 없는 무언가가 남는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김 PD(박원상)는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그녀를 보면서 '죽이지 않느냐'며 연신 감탄사를 연발한다. (사연을) 알 수 없는 대상에의 매혹에서 결국에는 죽음을 초래하는 에로스로의 연결. 그 중심에 기억과 망각의 장소로서의 육체가 놓여진다. 하지만 육체는 어떤것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를 말할 뿐이다. 이렇게 현재는 기억이 중첩된 장소,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지며 흔들리는 시간의 육체가 된다. 
 

2013. 6. 6. 최종 퇴고. 


Posted by 느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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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는) 올 때마다 얼른 떠나고 싶은 곳이오. 너무 산만하고 단절 되었지.” 마이클 만의 영화 <콜레트럴, Collateral>(2004)에서 빈센트는 이렇게 말한다. 빈센트의 대사는 도시 공간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상을 드러낸다. 그의 말처럼 도시는 산만하지만 동시에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도시의 단절성은 충돌의 전조이기도 하다. <콜레트럴>의 배경이 되는 미국과 다르게 거주지와 일터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 한국의 도시는 이러한 단절과 충돌의 뒤섞임이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창동의 <초록 물고기>(1997)는 재개발이 초래하는 가족의 해체를 느와르라는 장르적 틀을 빌어서 풀어낸다. 이 영화는 당시 일어났던 사회적 현상, 가령 신도시 개발과 그에 따르는 이권을 노린 세력들의 난입으로 인한 복마전을 영화의 청사진으로 삼는다. 도시의 확장은 전통적인 주거 공간을 해체하고 그 잔해를 도시 구획 내부로 편입한다. 이러한 편입은 상호 침투가 아닌, 일방적인 침탈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조직 보스 배태곤의 집요한 욕망은 도시라는 수직 공간의 속성과 닮아있다. 그것은 자기 복제되는 탐욕의 끊임없는 증식이다. 막동이는 배태곤의 신임을 얻음으로써 가족들과 함께 작은 음식점을 꾸려가는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한다. 그는 도시화로 인해 해체된 가족을 복원하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꿈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가족은 완벽하게 복원 될 수 없을 것이다. 망실되고 훼손 되어버린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이것은 순수와 비순수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변화는 필연적으로 낡음을 전제로 한다.

배태곤은 마치 신약의 악마처럼 막동이를 빌딩의 옥상으로 데려간다. 그는 재개발권을 따내기까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넌 꿈이 뭐냐?’라고 막동이에게 묻는다. 배태곤의 꿈과 막동이의 꿈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어두운 건물의 틈바구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막동이의 모습은 마치 도시의 아가리에 천천히 삼켜지는 것처럼 보인다. <초록 물고기>는 이제 막 장기가 생기고 뼈가 자라나기 시작하는 도시라는 거대하고 기괴한 생물이 탐욕스러운 몸집을 불려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괴물’이 아니라 ‘생물’이다.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 배태곤과 미애는 우연히 도시 외곽의 음식점에 들른다. 이곳은 마치 도시화라는 썰물에 외곽으로 떠밀려 버린 섬 처럼 보인다. 버드나무가 한가로이 흔들리는 이곳은 도시에서는 얻을 수 없는 안식이 있는 이상향 같다. 토종닭(이라고 주장하는) 닭 백숙을 맛있게 먹고난 배태곤과 미애는 적당히 만족을 찾은 평범한 부부처럼 보인다. 모든것이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막동이의 죽음이 폭력의 순환을 멈춘 것은 아니다. 잠시 유예 된 것이다. 희생양scape goat은 죄를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닥칠 위기를 잠시 뒤로 미뤄둔다. 결국 희생양은 위기를 지속시킴으로서 공동체를 더욱 견고히 한다. 애초에 감독은 막동이의 가족이 배태곤에게 복수하는 장면을 찍었지만 최종 편집에서는 제외 했다고 한다. 막동이 다음이 배태곤이 될 수도 있고, 미애가 될 수도 있다. 다음 술래가 당신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불신하고 두려워 하는것이 당연시 되는 풍경. 심지어는 목숨까지 앗아버리는 세계. 그것이 이창동이 <초록 물고기>에서 바라본 도시다. 


이수연 감독의 데뷔작 <4 인용 식탁>(2003)은 도시가 가지는 배타성의 근원을 급격한 근대화에서 찾는다. 도시라는 근대화의 산물은 수직적, 선형적 사고원리를 자양분으로 삼는다. 이 영화는 근대와 전근대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충돌이 벌어지는 무대로 아파트촌이 밀집된 신도시를 선택한다. 6 년 뒤에 만들어진 이용주 감독의 2009 년 데뷔작 <불신지옥>이 기독교신앙과 무속신앙의 충돌이 일어나는 주된 배경으로 (여전히) 아파트 단지를 설정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원은 어린 시절 신통력이 있다는 오해를 받아 학교도 가지 못하고 감금된 채로 가짜 부적을 써 주는 것으로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착취당한다. 그는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개척교회 목사에게 입양된다. 정원은 입양(adopted) 됨으로써 기독교/근대의 선형적 세계관을 이식(adapt) 받는다. 현재가 과거라는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그 쌓인 두께 만큼 망각의 거리는 멀어진다. 이 거리가 멀어질 수록 현재는 단단하고 안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결혼을 앞둔 정원은 어느 날 이상한 것들을 보기 시작한다. 죽은 아이가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 정확한 계획에 의해 세워지고 구획된 합리적 주거 공간인 아파트에 나타서는 안 되는,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전근대의 흔적들은 억압된 유령의 모습으로 출몰한다. 친족 살해를 저지른 정원과 죽은 어미를 마시고 살아남은 문정숙에게 과거는 단단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두 사람은 죽음이 매개하는 폭력을 통해 '생존' 했다는 비슷한 과거를 공유한다. 연은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본다. 또는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보여준 대가는 연에게 톡톡히 돌아온다. 남편은 그녀를 신경 쇠약으로 몰아붙인다. 연에게 호의를 가졌던 정원도 연으로 인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이 되살아나자 그녀를 거부하고 부정한다.‘사람들은 감당할 수 있는 것만 믿어요.’ 정원은 연에게 ‘당신 미쳤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어야 하는 합리적 세계 속에서 연의 예외적인 능력은 비이성적 사고의 산물, 유령의 복화술이다. 정원이 연을 끝까지 믿을 수 있었다면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간 시간은 한 번에 넘기기 힘들 정도로 뜨겁고 뻐근하다. 뜨거운 음식을 넘길 수 있을 때 정원은 한 가정의 가장이, 통과의례를 거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영화는 남기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의 4인용 식탁 맞은편에서 ‘맛있어요?’ 라고 묻는 연에게 ‘아직 뜨거워요’라고 말하는 정원의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떠나간 약혼자에게 ‘우리 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메시지를 남긴다.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놓아 버린 채 아무도 찾지 않는 아파트에 남아있는 그의 모습은 희미한 유령처럼 보인다. 이 도저한 비관이 묻어나는 마지막은 그 전의 어떤 한국 영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감독은 영화 속 연이 그랬던 것처럼,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입 바깥으로 쉽사리 내놓지 않았던 주제를 건드린다.

도시는 과거와 이제까지의 모든 것들로부터의 익숙하고 당연한 관계를 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도시는 폭력적인 단절의 결과물이다. 망각은 도시의 주거권을 얻기 위한 대가다. 도시화는 원래 있던 집과 밭과 논과 산을 모조리 밀어버리고 그 위에 콘크리트와 철골로 만들어진 덮개를 덮어버린다. 그러나 기억의 힘은 강하다. 과거를 아무리 덮어버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더라도 일그러진 벽면에 울렁거리는 그림자처럼, 과거는 불현듯 어슬렁거리며 출몰한다. <초록 물고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식사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온 미애는 지금 이 곳이 막동이가 보여준 사진 속의 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운전석으로 도망친 만삭의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주문을 읊는다. 막동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던 바로 그 밤의 주문이다. 어두운 밤의 기억이 밝은 대낮에, 그것도 전혀 다른 공간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두려움에 떠는 미애가 기대는 것은 도시가 거부해 왔던 비이성적인 주술의 언어다. 공교롭게도, <초록 물고기>와 <4인용 식탁>은 죄의식의 형태로라도 과거를 껴안을 수 있는 능력이 여성, 혹은 여성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창동, 이수연, 두 감독의 데뷔작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다. 남성에게 그런 능력이나 성향이 있는 경우 정원처럼 미치거나 막동이처럼 죽음을 맞이한다. 도시는 여성성 혹은 전근대성의 거세를 요구한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도시 바깥으로 떠돌거나 도시의 최하층에 머물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예외는 없다. 프리츠 랑의 <메트로 폴리스>에서 묘사된 도시 빈민의 모습은 더 이상 세기말적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이다. 도시 공간에 대한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전망은 본격적인 도시화와 함께 태어난 쌍둥이의 또 다른,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얼굴이다. 연결 고리를 찾기 힘든 두 감독이 자신의 데뷔작에서 공통적으로 신도시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에 대한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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