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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3.24 <엘리펀트 Elephant> 시네마틱 공간의 탐색


정성일은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을 두고,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시간을 사건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윤리적인 결정"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나는 과장이 심한 정성일식 관용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게 말하고 싶다. 거스 반 산트의 관심은 죽음에 대한 매혹에 닿아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의 공간과 시간을 재연을 넘어서, 재현의 극점에 도달하려는 행위에의 매혹. 그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한 순간이 상업영화의 단골 소재인 폭력과 섹스가 아닌 오직 죽음의 순간에 있음을 믿는 것 같다. 전작인 <게리 Gerry>(2002)는 죽음이라는 예외적이지만 필연적인 사건에 영화적 정수, 즉 시네마틱한 무엇이 있음을 감지하고 그것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이 영화는 '죽음 3 부작'의 시작이다. 스테디 캠을 이용한 공간의 횡단, 이를 통한 공간의 직조,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의 해체의 목적지는 사건의 재구성이 아닌, 공간들의 포착에 있다. 거스 반 산트는 스토리텔링으로서의 내러티브에 관심이 별로 없다. '사막으로 들어간 두 남자 중 한 남자가 죽고 한 남자는 살아나온다'는 것이 이 영화의 내러티브의 전부이다.

<엘리펀트>의 시간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겹쳐진다. 시간은 접히고, 구부려지고, 왼쪽이 오른쪽과 연결되고, 아래가 위와 만나면서 시간과 공간을 구축한다. 이 영화는 되돌릴 수 없이 결정화 된, 이미 일어난 실재의 사건을 명징하지만 다시 재현될 수 없는 공동空洞으로 상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중첩되는 방사형의 공간들을 묘파한다.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등 뒤의 카메라의 위치는 관객의 자리이다. 시점 쇼트point of view에 준하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이 위치는 관객으로 하여금 등장인물에 근접한 시선을 가지도록 유도함으로써 정서적 유대감과 동일시를 이끌어낸다. <엘리펀트>는 표준 렌즈(50mm) 이상의 초점거리가 긴 렌즈로 촬영되었다. 이러한 렌즈의 선택은 카메라가 따라가는 인물을 배경에서 약간 도드라지게 한다. 이때 카메라의 심도, 그러니까 초점focus이 맞는 영역area은 극도로 얇아져서, 렌즈의 초점이 맞추어진 바로 앞의 인물과 배경을 제외한 나머지는 흐릿한 공간의 덩어리 같은 것으로 남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계속해서 이동한다. 정확히는, 카메라가 계속해서 이동한다. 일반적으로 이동이 많은 장면들은 카메라의 이동뿐만 아니라 조명의 위치를 고민하게 된다. 이 때 가장 손쉬운 대안은 빛을 받아들이는 양이 많은 밝은 렌즈와 고감도 필름을 선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펀트>는 초점 거리가 긴, 상대적으로 어두운 렌즈를 이용해서 대부분의 장면들을 찍었다. 인물이 밝은 실내에서 어두운 실내로 이동하고 다시 복도에서 건물 사이의 중정으로 이동하면서 화면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급격하게 변화된다. 이 때 중요해지는 것은 등장인물과 배경의 묘사, 연속되는 공간의 지각이 아니라 등장인물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그럼으로써 일어나는 인물과 주변의 끊임없는 변화에 있다. 인물의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 프레임 속 풍경은, 그러니까 관객이 보고 있는, 관객의 시야는 계속해서 새로운 배경과 인물들로 변화된다. 사물과 인물들은 장초점 렌즈로 인해 극도로 얇아진 초점 영역layer 안쪽으로 들어왔다 잠시 머물 겨를도 없이 다시 사라져 간다. 이것은 인물들이 각자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망을, 그 무심한 씨줄과 날줄의 얽힘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쌓여가는 얇고 연약한 삶의 결을 포착하는 이 영화의 시선이다.

사진반의 일라이가 존에게 안부를 물으면서 사진을 찍는 동안 그 뒤로 특활 시간에 늦은 미셸이 뛰어간다. 이 장면은 세 번 반복된다. 아주 잠시 동안 시간 속에서 공유하는 이 공간을 하나의 장 sphere 이라고 한다면 그들 각자의 방향에서 바라본 시간과 공간은 길게 이어지는 복도 어디쯤에서 슬쩍 얽히고, 다시 풀어진다. 이러한 시간의 반복, 공간의 맺힘과 풀림은 장초점 렌즈를 선택한 이유와 동일한 목적을 갖는다. <엘리펀트>는 반복되는 시간의 재연을 통해 인물과 인물이 아주 얇게 겹쳐지는 그 순간들을 찾아낸다. 이러한 구성을 편집의 기교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어차피 반복되는 장면들은 다른 방향에서 다시 촬영한 것이다. 카메라는 횡과 종으로 이동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탐색하고 구축한다. 지각한 존이 교무실에서 나가서 빈 교실에서 울다가 여자 아이의 키스를 받고, 일라이를 만나 사진을 찍고, 학교 바깥으로 나가면서 무장한 알렉스와 에릭을 만나기까지의 짧은 시간은 카메라의 이동, 시간의 반복으로 인해 입체적인 부피를 가진다. 이것은 말하자면 시간을 지구본의 지도처럼 펼친 다음, 다시 부분과 부분이 이루는 조합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가상의 공간을 재현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한가지, <엘리펀트>는 실제의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죽음 3 부작에 해당하는 작품- <게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 - 들이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 작품이 어떤 형태로든 말초적인 호기심을 부추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성일과의 대담에서 전찬일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서 일반 관객과 소통하지 못한 영화’라고 말했다. 그의 지적은 정확하다. 이 영화는 사건을 설명하거나 사건의 원인을 밝혀내려 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영화라는 재연再演의 매체가 지닌 자신의 근원적인 한계를 넘어 재현再現의 극점에 도달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한다.

<엘리펀트> 후반부의 총격장면은 어떤 사실적인 기록 화면보다도 더 충격적이다. 사람이 사람을 쏘아버린다는 것. 사람이 누군가의 생명을 어떠한 감흥도 없이 앗아버린다는 행위는, 일반적인 인식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우리는 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영화도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단서로 보이는 것들이 띄엄띄엄 던져져 있지만, 어떠한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엘리펀트>는 원인을 탐색하지 않는다. 이유도 묻지 않는다. 예를 들어 TV에서 방영되는 나치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많은 오해를 가져왔다. 평자들은 나치의 지식인 탄압과 괴벨스의 프로파간다 전략을 현대 미국에 대한 코멘트로서 어떻게든 읽어내려고 많은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한 시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자막 없이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이러한 이미지가 배음overtone으로서의 노이즈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펀트>는 실재의 사건을 세속의 호기심이 아닌 영화적 논리로 충실히 구축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 중심에는 거대한 동공洞空이 존재한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될 수 없는 죽음. 다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 죽음이 거기 있었고, 삶 또한 존재했다는 것을 투명한 중재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히 ‘리얼’한 것이 아닌, 시네마틱 공간의 새로운 구축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부재不在의 문제이다. 이미 일어난 일, 그러나 지나간 일을 어떻게, 왜 재현하는가의 문제.





Posted by 느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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