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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14 섭은낭이 죽인 것.

섭은낭이 죽인 것.

片/結 / 2016. 2. 14. 02:21



“날아가는 새를 죽이는 것처럼 쉽다.” 


부패한 관리를 제거할 것을 명령하면서 여도사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섭은낭의 첫 번째 임무. 첫 살인일 것이다. 날아가는 새를 죽이는 것이 말처럼 쉬울까? 그렇게 살인이 쉬운 것인가? 빠르고 경쾌한 날갯짓을 가진 새를 죽이는 것만큼, 살인이 쉬울까. 이 말의 의미가 궁금해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순간, 섭은낭이 가볍게 뛰어오른다. 손 안의 짧은 비수가 호를 긋는다. 솟구치는 피도, 비명도 없다. 말 위의 남자가 잠들 듯 쓰러진다. 


두 번째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온 섭은낭은 말한다. ’ 아이가 너무 귀여워 죽일 수 없었습니다.’ 천진할 정도로 당돌한 이유. ‘아이가 보고 있어서’도 아니고 ‘아이가 귀엽다’고. 그녀의 스승은 섭은낭에게 ‘검술은 완벽하나 마음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섭은낭의 정인이었던 전계안을 암살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다. 여기까지가 이 영화의 프롤로그. 


<자객 섭은낭>은 허우 샤오시엔의 신작이다. <빨간 풍선> 이후 8년 만의 새 작품이라는데 무협영화로 돌아왔다니 놀랍다. 어떤 사람들은 <자객 섭은낭>에 ‘수정주의 무협극’이라는 타이틀을 붙인다. 아마도 익숙한 무협 장르의 틀을 가뿐히 뛰어넘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허우 샤오시엔은 무협영화의 ‘틀’ 보다는 자객의 ‘마음’에 집중한다. 간혹 부득이하게 벌어지는 검격 장면에서 조차, 섭은낭은 표정의 변화 없이 상대방의 공격을 흘려보낸다. 그녀의 모습은 실력이 뛰어난 고수의 퐁모 보다는 도인에 가깝다.





거리를 두고 인물들을 관찰하듯 포착하는 카메라는 섭은낭의 시선과 닮아 있다. 전계안의 첩의 처소를 보여주는 시퀀스를 꼽아볼 수 있다. 이 장면은 몹시 아름답다. 열린 창문으로 넘어오는 바람소리,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화면에 가득하다. 침소를 장식한 얇은 천의 움직임에 따라 섭은낭의 마음도 일렁이는 것 같다. 전계안과 본처가 한 화면에 잡힐 때, 그는 매번 화면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동일한 구도로 촬영된 첩의 처소에서 전계안은 화면의 중앙을 차지한다. 전계안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섭은낭은 종종 카메라의 위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등장인물의 시점 쇼트를 쉽게 허용하지 않던 감독의 전작들과 다른 점이다. 그림자처럼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낸 섭은낭은 지니고 있던 정표를 남겨둔다. 전계안은 이를 두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한 다음 죽이려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섭은낭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녀는 오랫동안 소중히 품어왔을 정표를 미련 없이 남겨두고 떠난다. 이 영화는 마치 두 개의 다른 영화가 하나의 공간에 공존하는 것 같다. 섭은낭은 고요하고 침착하며, 예측하기 어렵다. 그녀는 상상 가능한 모든 인간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는 등장인물들 사이를 표표히 유영한다. 정치적인 야망과 음모, 처와 첩의 암투, 섭은낭을 완벽한 암살자로 거듭나게 하려는 스승의 욕심, 자신의 외로움을 거울처럼 보듬어줄 사람을 갈구하는 가신 공주의 외로움과 슬픔. 


그녀를 두고 스승은 자객으로서 마음이 모질지 못하다며 질책한다.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그녀를 스승이 공격한다. 승부는 단 몇 합만에 결정 난다. 이번에도 죽이지 않았다. 스승의 품에 아주 짧고 얕은 칼 자욱만 남긴다. 자신을 키워준 스승에 대해 이보다 더 멋진 인사는 없을 것이다. 섭은낭은 자객으로서 실패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제는 변해버린,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마음도,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도, 원치 않았던 자객의 길로 내몰았던 과거도. 이제는 어쩔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그녀는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살인은 ‘날아가는 새를 죽이는 것처럼’ 쉽다. 여도사의 말이 맞았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마음이다. 


그녀는 가장 어려운 상대를 죽인 것이다.






Posted by 느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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