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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은낭이 죽인 것.

片/結 / 2016. 2. 14. 02:21



“날아가는 새를 죽이는 것처럼 쉽다.” 


부패한 관리를 제거할 것을 명령하면서 여도사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섭은낭의 첫 번째 임무. 첫 살인일 것이다. 날아가는 새를 죽이는 것이 말처럼 쉬울까? 그렇게 살인이 쉬운 것인가? 빠르고 경쾌한 날갯짓을 가진 새를 죽이는 것만큼, 살인이 쉬울까. 이 말의 의미가 궁금해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순간, 섭은낭이 가볍게 뛰어오른다. 손 안의 짧은 비수가 호를 긋는다. 솟구치는 피도, 비명도 없다. 말 위의 남자가 잠들 듯 쓰러진다. 


두 번째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온 섭은낭은 말한다. ’ 아이가 너무 귀여워 죽일 수 없었습니다.’ 천진할 정도로 당돌한 이유. ‘아이가 보고 있어서’도 아니고 ‘아이가 귀엽다’고. 그녀의 스승은 섭은낭에게 ‘검술은 완벽하나 마음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섭은낭의 정인이었던 전계안을 암살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다. 여기까지가 이 영화의 프롤로그. 


<자객 섭은낭>은 허우 샤오시엔의 신작이다. <빨간 풍선> 이후 8년 만의 새 작품이라는데 무협영화로 돌아왔다니 놀랍다. 어떤 사람들은 <자객 섭은낭>에 ‘수정주의 무협극’이라는 타이틀을 붙인다. 아마도 익숙한 무협 장르의 틀을 가뿐히 뛰어넘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허우 샤오시엔은 무협영화의 ‘틀’ 보다는 자객의 ‘마음’에 집중한다. 간혹 부득이하게 벌어지는 검격 장면에서 조차, 섭은낭은 표정의 변화 없이 상대방의 공격을 흘려보낸다. 그녀의 모습은 실력이 뛰어난 고수의 퐁모 보다는 도인에 가깝다.





거리를 두고 인물들을 관찰하듯 포착하는 카메라는 섭은낭의 시선과 닮아 있다. 전계안의 첩의 처소를 보여주는 시퀀스를 꼽아볼 수 있다. 이 장면은 몹시 아름답다. 열린 창문으로 넘어오는 바람소리,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화면에 가득하다. 침소를 장식한 얇은 천의 움직임에 따라 섭은낭의 마음도 일렁이는 것 같다. 전계안과 본처가 한 화면에 잡힐 때, 그는 매번 화면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동일한 구도로 촬영된 첩의 처소에서 전계안은 화면의 중앙을 차지한다. 전계안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섭은낭은 종종 카메라의 위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등장인물의 시점 쇼트를 쉽게 허용하지 않던 감독의 전작들과 다른 점이다. 그림자처럼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낸 섭은낭은 지니고 있던 정표를 남겨둔다. 전계안은 이를 두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한 다음 죽이려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섭은낭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녀는 오랫동안 소중히 품어왔을 정표를 미련 없이 남겨두고 떠난다. 이 영화는 마치 두 개의 다른 영화가 하나의 공간에 공존하는 것 같다. 섭은낭은 고요하고 침착하며, 예측하기 어렵다. 그녀는 상상 가능한 모든 인간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는 등장인물들 사이를 표표히 유영한다. 정치적인 야망과 음모, 처와 첩의 암투, 섭은낭을 완벽한 암살자로 거듭나게 하려는 스승의 욕심, 자신의 외로움을 거울처럼 보듬어줄 사람을 갈구하는 가신 공주의 외로움과 슬픔. 


그녀를 두고 스승은 자객으로서 마음이 모질지 못하다며 질책한다.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그녀를 스승이 공격한다. 승부는 단 몇 합만에 결정 난다. 이번에도 죽이지 않았다. 스승의 품에 아주 짧고 얕은 칼 자욱만 남긴다. 자신을 키워준 스승에 대해 이보다 더 멋진 인사는 없을 것이다. 섭은낭은 자객으로서 실패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제는 변해버린,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마음도,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도, 원치 않았던 자객의 길로 내몰았던 과거도. 이제는 어쩔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그녀는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살인은 ‘날아가는 새를 죽이는 것처럼’ 쉽다. 여도사의 말이 맞았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마음이다. 


그녀는 가장 어려운 상대를 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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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은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을 두고,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시간을 사건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윤리적인 결정"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나는 과장이 심한 정성일식 관용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게 말하고 싶다. 거스 반 산트의 관심은 죽음에 대한 매혹에 닿아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의 공간과 시간을 재연을 넘어서, 재현의 극점에 도달하려는 행위에의 매혹. 그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한 순간이 상업영화의 단골 소재인 폭력과 섹스가 아닌 오직 죽음의 순간에 있음을 믿는 것 같다. 전작인 <게리 Gerry>(2002)는 죽음이라는 예외적이지만 필연적인 사건에 영화적 정수, 즉 시네마틱한 무엇이 있음을 감지하고 그것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이 영화는 '죽음 3 부작'의 시작이다. 스테디 캠을 이용한 공간의 횡단, 이를 통한 공간의 직조,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의 해체의 목적지는 사건의 재구성이 아닌, 공간들의 포착에 있다. 거스 반 산트는 스토리텔링으로서의 내러티브에 관심이 별로 없다. '사막으로 들어간 두 남자 중 한 남자가 죽고 한 남자는 살아나온다'는 것이 이 영화의 내러티브의 전부이다.

<엘리펀트>의 시간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겹쳐진다. 시간은 접히고, 구부려지고, 왼쪽이 오른쪽과 연결되고, 아래가 위와 만나면서 시간과 공간을 구축한다. 이 영화는 되돌릴 수 없이 결정화 된, 이미 일어난 실재의 사건을 명징하지만 다시 재현될 수 없는 공동空洞으로 상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중첩되는 방사형의 공간들을 묘파한다.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등 뒤의 카메라의 위치는 관객의 자리이다. 시점 쇼트point of view에 준하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이 위치는 관객으로 하여금 등장인물에 근접한 시선을 가지도록 유도함으로써 정서적 유대감과 동일시를 이끌어낸다. <엘리펀트>는 표준 렌즈(50mm) 이상의 초점거리가 긴 렌즈로 촬영되었다. 이러한 렌즈의 선택은 카메라가 따라가는 인물을 배경에서 약간 도드라지게 한다. 이때 카메라의 심도, 그러니까 초점focus이 맞는 영역area은 극도로 얇아져서, 렌즈의 초점이 맞추어진 바로 앞의 인물과 배경을 제외한 나머지는 흐릿한 공간의 덩어리 같은 것으로 남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계속해서 이동한다. 정확히는, 카메라가 계속해서 이동한다. 일반적으로 이동이 많은 장면들은 카메라의 이동뿐만 아니라 조명의 위치를 고민하게 된다. 이 때 가장 손쉬운 대안은 빛을 받아들이는 양이 많은 밝은 렌즈와 고감도 필름을 선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펀트>는 초점 거리가 긴, 상대적으로 어두운 렌즈를 이용해서 대부분의 장면들을 찍었다. 인물이 밝은 실내에서 어두운 실내로 이동하고 다시 복도에서 건물 사이의 중정으로 이동하면서 화면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급격하게 변화된다. 이 때 중요해지는 것은 등장인물과 배경의 묘사, 연속되는 공간의 지각이 아니라 등장인물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그럼으로써 일어나는 인물과 주변의 끊임없는 변화에 있다. 인물의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 프레임 속 풍경은, 그러니까 관객이 보고 있는, 관객의 시야는 계속해서 새로운 배경과 인물들로 변화된다. 사물과 인물들은 장초점 렌즈로 인해 극도로 얇아진 초점 영역layer 안쪽으로 들어왔다 잠시 머물 겨를도 없이 다시 사라져 간다. 이것은 인물들이 각자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망을, 그 무심한 씨줄과 날줄의 얽힘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쌓여가는 얇고 연약한 삶의 결을 포착하는 이 영화의 시선이다.

사진반의 일라이가 존에게 안부를 물으면서 사진을 찍는 동안 그 뒤로 특활 시간에 늦은 미셸이 뛰어간다. 이 장면은 세 번 반복된다. 아주 잠시 동안 시간 속에서 공유하는 이 공간을 하나의 장 sphere 이라고 한다면 그들 각자의 방향에서 바라본 시간과 공간은 길게 이어지는 복도 어디쯤에서 슬쩍 얽히고, 다시 풀어진다. 이러한 시간의 반복, 공간의 맺힘과 풀림은 장초점 렌즈를 선택한 이유와 동일한 목적을 갖는다. <엘리펀트>는 반복되는 시간의 재연을 통해 인물과 인물이 아주 얇게 겹쳐지는 그 순간들을 찾아낸다. 이러한 구성을 편집의 기교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어차피 반복되는 장면들은 다른 방향에서 다시 촬영한 것이다. 카메라는 횡과 종으로 이동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탐색하고 구축한다. 지각한 존이 교무실에서 나가서 빈 교실에서 울다가 여자 아이의 키스를 받고, 일라이를 만나 사진을 찍고, 학교 바깥으로 나가면서 무장한 알렉스와 에릭을 만나기까지의 짧은 시간은 카메라의 이동, 시간의 반복으로 인해 입체적인 부피를 가진다. 이것은 말하자면 시간을 지구본의 지도처럼 펼친 다음, 다시 부분과 부분이 이루는 조합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가상의 공간을 재현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한가지, <엘리펀트>는 실제의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죽음 3 부작에 해당하는 작품- <게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 - 들이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 작품이 어떤 형태로든 말초적인 호기심을 부추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성일과의 대담에서 전찬일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서 일반 관객과 소통하지 못한 영화’라고 말했다. 그의 지적은 정확하다. 이 영화는 사건을 설명하거나 사건의 원인을 밝혀내려 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영화라는 재연再演의 매체가 지닌 자신의 근원적인 한계를 넘어 재현再現의 극점에 도달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한다.

<엘리펀트> 후반부의 총격장면은 어떤 사실적인 기록 화면보다도 더 충격적이다. 사람이 사람을 쏘아버린다는 것. 사람이 누군가의 생명을 어떠한 감흥도 없이 앗아버린다는 행위는, 일반적인 인식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우리는 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영화도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단서로 보이는 것들이 띄엄띄엄 던져져 있지만, 어떠한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엘리펀트>는 원인을 탐색하지 않는다. 이유도 묻지 않는다. 예를 들어 TV에서 방영되는 나치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많은 오해를 가져왔다. 평자들은 나치의 지식인 탄압과 괴벨스의 프로파간다 전략을 현대 미국에 대한 코멘트로서 어떻게든 읽어내려고 많은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한 시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자막 없이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이러한 이미지가 배음overtone으로서의 노이즈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펀트>는 실재의 사건을 세속의 호기심이 아닌 영화적 논리로 충실히 구축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 중심에는 거대한 동공洞空이 존재한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될 수 없는 죽음. 다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 죽음이 거기 있었고, 삶 또한 존재했다는 것을 투명한 중재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히 ‘리얼’한 것이 아닌, 시네마틱 공간의 새로운 구축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부재不在의 문제이다. 이미 일어난 일, 그러나 지나간 일을 어떻게, 왜 재현하는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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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Llewyn Davis (2012)

片/結 / 2013. 11. 30. 14:50





코엔 형제의 신작 <Inside Llewyn Davis>에서 존 굿맨이 연기한 롤랜드 캐릭터는 이질적이다. 그는 갑자기 등장해서 약에 취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버려진다. 부두교를 공부했다고 주장하는 이 남자가 정말로 무엇을 하는 인간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생각해 보면 단 두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성격이 파악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코엔 형제는 사실성을 위해 일부러 모호한 캐릭터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무의식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이러한 캐릭터는 코엔 형제의 다른 영화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애리조나 유괴사건>에서 주인공을 추격하는 거구의 남자, <시리어스 맨>의 늙은 랍비, <바톤 핑크>의 세일즈맨 찰리. 일반적인 시나리오 작법에서 캐릭터는 반드시 어떤 역할을 통해 이야기를 발전시킨다. 하지만 코엔 형제의 영화속 캐릭터들은 갑자기 나타나 어떤 이야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심지어 주인공 르윈의 내면(inside)이 어렴풋이 짐작될만 할 때 영화는 갑자기 끝난다. 


코엔 형제는 르윈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똑같은 장면을 영화의 시작과 끝 부분에 배치한다. 차이점이라면 고양이가 집을 나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다. 두 번째 아침 장면에서 르윈은 이미 알고 있다는듯이 솜씨좋게 고양이의 가출을 저지한다. 이 장면 때문에 영화에서 일어난 일들의 대부분이 마치 르윈의 꿈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프닝에서 르윈은 'Hang Me, Oh Hang Me'를 부른뒤 '또 한 곡을 부를거지만, 어차피 포크송은 그놈이 그놈이기 때문에 크게 기대는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도, 우리도 대부분 그날이 그날같은 매일을 살아 간다. 만약, 어떤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면, 그를,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디에도 닫지 못하는 폐허(ruin)와도 같은 삶의 불가해한 풍경을 묘파하는 이영화는 몹시 아프다. 하지만 코엔 형제의 영화가 매번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르윈이 뉴욕에서 시카고로, 다시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만났던, 끝없이 다가오고 사라지는 길위의 표정들처럼, 삶이 정물 보다는 비정형의 흐름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신 운전해주는 조건으로 시카고에서 뉴욕까지 차를 얻어탄 르윈은 어두운 도로로 뛰어든 무언가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차를 세운다. 인적없이 캄캄한 도로 위로 눈발이 신산하게 흩날린다. 무겁게 눈꺼풀을 내리누르던 잠도 달아나 버린것 같다. 자동차 앞범퍼에는 피가 묻어있다. 어떤 짐승을 친것 같은데 도로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피, 눈, 어둠,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말러의 교향곡, 숲속으로 절룩거리며 사라지는 개인지 고양이인지 알 수 없는 짐승. 세상이 잠시 멈춘 것 같은 이 장면은 신비롭고 아름답다. 이질적인 것들의 우연한 만남, 누구도 예상할 수 없고 제어 할 수 없는 우연성의 결절들. 르윈 데이비스라는 어떤 남자의 내면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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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야간 산행을 하면서 어느정도 산길에 익숙해지면 손전등을 끈다. 때로는 순간적으로 온몸의 감각이 차단된 것 같은 공포감을 느끼기도 한다. 온통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으면 주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시야가 제한되는 그만큼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진다. 발걸음과 호흡이 조용히 가라 앉는다. 산속이 고요한 바닷속처럼 달빛 속에서 일렁인다. 바로 앞 어둠 속에서 무언가 숨쉬고 있는것 같은데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무섭고 매혹적이다. 온통 푸르고 투명한 그림자들만 가득하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불빛이 마치 별같다. 하늘과 땅이 뒤섞인채로 천지사방이 별뿐인것 같다. 


뤽 베송의 <그랑블루> 리마스터링 버전을 다시 봤다. 영화 속 바다는 기억처럼 푸르고 눈부시지 않았다. 차라리 청회색의 모노톤에 더 가깝다. 이 영화는 거대한 어둠에 관한 이야기다. 엔조는 죽어가면서 자크에게 '네 말이 맞았어. 저 아래가 이 위보다 더 좋더라'고 말한다. 자크는 조안나에게 '다이빙을 하다보면 저 아래에서 다시 이 위로 올라와야 할 이유를 찾는것이 제일 어려워'라고 말한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때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다시 보게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크는 결국 자신이 택한 어둠속으로 침참하는것을 택한다. 사람이 어둠을 이겨낼 수 있을까. 밤이면 환하게 주위를 밝혀도 어둠은 사라진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주위에서 끈질기고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다. 어둠은 이겨내거나 쫒아낼 수 없다. 이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자크가 더 깊은 심해로 내려갈 수록, 겹겹이 쌓인 푸른 바다가 결국 완벽하게 칠흙같은 어둠으로 변하는 것처럼, 어둠과 빛은 양립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한몸처럼 거기에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크는 사랑하는 연인마저도 버리고 바다밑 깊은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극단적인 선택, 극단적인 단절, 그는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선택함으로서 모든 세계를 파괴한다. 

 

우리는 완벽하게 혼자이면서 동시에 함께 살아간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둠과 빛 모두를 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불완전한 채로 삶이라는 완벽한 모순을 끌어안을 것을 요구 받는다. 그러나 자끄는 끊임없이 순수한 세계를 동경한다. 계속 물을 끼얹어 줘야 뭍위에서 살 수 있었던 돌고래처럼, 자끄는 사람들과 가까워질수록 더 깊은 어둠속으로 돌아간다. 그가 결국 바닷속 어둠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공감되지도 않고, 매혹되지도 않는다. <그랑블루>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움직였던 장면은 숨을 거둔 엔조가 푸른 어둠속으로 말없이 가라앉는 순간이다. 말없이, 눈물도 없이 죽음과 단절을 받아들이는 순간. 


어두운 산길이 익숙해질 때쯤 되면 하나둘 산아래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 빛, 이른 새벽 불켜진 창문들 밑을 지나다 보면 일찍 일어난 누군가의 밭은 기침소리, 아침 상의 그릇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죽은 듯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난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온다. 또다른 밤을 맞이하기 위해 하루를 다시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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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는) 올 때마다 얼른 떠나고 싶은 곳이오. 너무 산만하고 단절 되었지.” 마이클 만의 영화 <콜레트럴, Collateral>(2004)에서 빈센트는 이렇게 말한다. 빈센트의 대사는 도시 공간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상을 드러낸다. 그의 말처럼 도시는 산만하지만 동시에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도시의 단절성은 충돌의 전조이기도 하다. <콜레트럴>의 배경이 되는 미국과 다르게 거주지와 일터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 한국의 도시는 이러한 단절과 충돌의 뒤섞임이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창동의 <초록 물고기>(1997)는 재개발이 초래하는 가족의 해체를 느와르라는 장르적 틀을 빌어서 풀어낸다. 이 영화는 당시 일어났던 사회적 현상, 가령 신도시 개발과 그에 따르는 이권을 노린 세력들의 난입으로 인한 복마전을 영화의 청사진으로 삼는다. 도시의 확장은 전통적인 주거 공간을 해체하고 그 잔해를 도시 구획 내부로 편입한다. 이러한 편입은 상호 침투가 아닌, 일방적인 침탈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조직 보스 배태곤의 집요한 욕망은 도시라는 수직 공간의 속성과 닮아있다. 그것은 자기 복제되는 탐욕의 끊임없는 증식이다. 막동이는 배태곤의 신임을 얻음으로써 가족들과 함께 작은 음식점을 꾸려가는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한다. 그는 도시화로 인해 해체된 가족을 복원하기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꿈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가족은 완벽하게 복원 될 수 없을 것이다. 망실되고 훼손 되어버린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이것은 순수와 비순수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변화는 필연적으로 낡음을 전제로 한다.

배태곤은 마치 신약의 악마처럼 막동이를 빌딩의 옥상으로 데려간다. 그는 재개발권을 따내기까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넌 꿈이 뭐냐?’라고 막동이에게 묻는다. 배태곤의 꿈과 막동이의 꿈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어두운 건물의 틈바구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막동이의 모습은 마치 도시의 아가리에 천천히 삼켜지는 것처럼 보인다. <초록 물고기>는 이제 막 장기가 생기고 뼈가 자라나기 시작하는 도시라는 거대하고 기괴한 생물이 탐욕스러운 몸집을 불려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괴물’이 아니라 ‘생물’이다.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 배태곤과 미애는 우연히 도시 외곽의 음식점에 들른다. 이곳은 마치 도시화라는 썰물에 외곽으로 떠밀려 버린 섬 처럼 보인다. 버드나무가 한가로이 흔들리는 이곳은 도시에서는 얻을 수 없는 안식이 있는 이상향 같다. 토종닭(이라고 주장하는) 닭 백숙을 맛있게 먹고난 배태곤과 미애는 적당히 만족을 찾은 평범한 부부처럼 보인다. 모든것이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막동이의 죽음이 폭력의 순환을 멈춘 것은 아니다. 잠시 유예 된 것이다. 희생양scape goat은 죄를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닥칠 위기를 잠시 뒤로 미뤄둔다. 결국 희생양은 위기를 지속시킴으로서 공동체를 더욱 견고히 한다. 애초에 감독은 막동이의 가족이 배태곤에게 복수하는 장면을 찍었지만 최종 편집에서는 제외 했다고 한다. 막동이 다음이 배태곤이 될 수도 있고, 미애가 될 수도 있다. 다음 술래가 당신이 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불신하고 두려워 하는것이 당연시 되는 풍경. 심지어는 목숨까지 앗아버리는 세계. 그것이 이창동이 <초록 물고기>에서 바라본 도시다. 


이수연 감독의 데뷔작 <4 인용 식탁>(2003)은 도시가 가지는 배타성의 근원을 급격한 근대화에서 찾는다. 도시라는 근대화의 산물은 수직적, 선형적 사고원리를 자양분으로 삼는다. 이 영화는 근대와 전근대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의 충돌이 벌어지는 무대로 아파트촌이 밀집된 신도시를 선택한다. 6 년 뒤에 만들어진 이용주 감독의 2009 년 데뷔작 <불신지옥>이 기독교신앙과 무속신앙의 충돌이 일어나는 주된 배경으로 (여전히) 아파트 단지를 설정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원은 어린 시절 신통력이 있다는 오해를 받아 학교도 가지 못하고 감금된 채로 가짜 부적을 써 주는 것으로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착취당한다. 그는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개척교회 목사에게 입양된다. 정원은 입양(adopted) 됨으로써 기독교/근대의 선형적 세계관을 이식(adapt) 받는다. 현재가 과거라는 이름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그 쌓인 두께 만큼 망각의 거리는 멀어진다. 이 거리가 멀어질 수록 현재는 단단하고 안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결혼을 앞둔 정원은 어느 날 이상한 것들을 보기 시작한다. 죽은 아이가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 정확한 계획에 의해 세워지고 구획된 합리적 주거 공간인 아파트에 나타서는 안 되는,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전근대의 흔적들은 억압된 유령의 모습으로 출몰한다. 친족 살해를 저지른 정원과 죽은 어미를 마시고 살아남은 문정숙에게 과거는 단단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두 사람은 죽음이 매개하는 폭력을 통해 '생존' 했다는 비슷한 과거를 공유한다. 연은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본다. 또는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보여준 대가는 연에게 톡톡히 돌아온다. 남편은 그녀를 신경 쇠약으로 몰아붙인다. 연에게 호의를 가졌던 정원도 연으로 인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이 되살아나자 그녀를 거부하고 부정한다.‘사람들은 감당할 수 있는 것만 믿어요.’ 정원은 연에게 ‘당신 미쳤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어야 하는 합리적 세계 속에서 연의 예외적인 능력은 비이성적 사고의 산물, 유령의 복화술이다. 정원이 연을 끝까지 믿을 수 있었다면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간 시간은 한 번에 넘기기 힘들 정도로 뜨겁고 뻐근하다. 뜨거운 음식을 넘길 수 있을 때 정원은 한 가정의 가장이, 통과의례를 거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영화는 남기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의 4인용 식탁 맞은편에서 ‘맛있어요?’ 라고 묻는 연에게 ‘아직 뜨거워요’라고 말하는 정원의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떠나간 약혼자에게 ‘우리 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메시지를 남긴다.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놓아 버린 채 아무도 찾지 않는 아파트에 남아있는 그의 모습은 희미한 유령처럼 보인다. 이 도저한 비관이 묻어나는 마지막은 그 전의 어떤 한국 영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감독은 영화 속 연이 그랬던 것처럼,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입 바깥으로 쉽사리 내놓지 않았던 주제를 건드린다.

도시는 과거와 이제까지의 모든 것들로부터의 익숙하고 당연한 관계를 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도시는 폭력적인 단절의 결과물이다. 망각은 도시의 주거권을 얻기 위한 대가다. 도시화는 원래 있던 집과 밭과 논과 산을 모조리 밀어버리고 그 위에 콘크리트와 철골로 만들어진 덮개를 덮어버린다. 그러나 기억의 힘은 강하다. 과거를 아무리 덮어버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더라도 일그러진 벽면에 울렁거리는 그림자처럼, 과거는 불현듯 어슬렁거리며 출몰한다. <초록 물고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식사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온 미애는 지금 이 곳이 막동이가 보여준 사진 속의 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운전석으로 도망친 만삭의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주문을 읊는다. 막동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던 바로 그 밤의 주문이다. 어두운 밤의 기억이 밝은 대낮에, 그것도 전혀 다른 공간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두려움에 떠는 미애가 기대는 것은 도시가 거부해 왔던 비이성적인 주술의 언어다. 공교롭게도, <초록 물고기>와 <4인용 식탁>은 죄의식의 형태로라도 과거를 껴안을 수 있는 능력이 여성, 혹은 여성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창동, 이수연, 두 감독의 데뷔작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다. 남성에게 그런 능력이나 성향이 있는 경우 정원처럼 미치거나 막동이처럼 죽음을 맞이한다. 도시는 여성성 혹은 전근대성의 거세를 요구한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도시 바깥으로 떠돌거나 도시의 최하층에 머물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예외는 없다. 프리츠 랑의 <메트로 폴리스>에서 묘사된 도시 빈민의 모습은 더 이상 세기말적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이다. 도시 공간에 대한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전망은 본격적인 도시화와 함께 태어난 쌍둥이의 또 다른,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얼굴이다. 연결 고리를 찾기 힘든 두 감독이 자신의 데뷔작에서 공통적으로 신도시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에 대한 방증이다.







Posted by 느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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