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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낯선 나라다
- 부재不在를 응시하는 것


과거는 낯설다. 과거는 기억 속에, 지나간 시간 속에, 우리가, 당신이 이미 겪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과거는 지나간 기억과 시간과 공간 속에 있었던 것이다. 과거는 ‘과거형’으로만 존재한다. 과거가 여기, 지금, 현재의 시간 속에 꺼내어 질 때, 과거는 미화되거나 누군가의 추억담처럼 낯선 것이 되어 버린다. “정말로 그랬었나요? 그 기억은 정확한가요? 그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보고 있었지요? 당신은 어떤 말을 했었죠? 그 때 당신의 곁에는 누가 있었죠? 그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나요? 그 사람의 이름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영화란 존재할 수 없다. 객관적인 척을 하는, 객관성을 흉내 내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한 영화들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 왔다. 영화는 결국 관객과 만든이가 공모하는, 기꺼운 속임수다. 영화의 태생적인 한계는 주관성을 피해갈 수 없다. 영화는 만드는 이, 그것을 바라보는 이 모두에게 있어 시선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가급적 객관적으로 가감 없이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가급적’ 이라는 것에 주의하자. 위에도 적었지만, ‘철저하게 객관적인 영화란 존재할 수 없다’. 다큐멘터리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의 기록을 보여주고, 보여주기를 통해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큐멘터리이다. 그렇다면 소박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만약에 무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다큐멘터리는 성립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고 감독은 대답한다. 무언가 찍어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주제가 되는 것이 이제는 없다. 객관적 사료나, 신문기사, 뉴스 영상,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대로를 찍어서 보여주는 것이다. 또는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명성, 그 6일의 기록>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계속되는 농성과 공권력의 압박으로 피로에 지친 시위 참가자들이 벌였던 논쟁과 의견대립을 다루고 있는 한 장면에서, 감독은 당시 논쟁이 벌어졌던 (곳으로 추정되는) 조그만 소성당 내부를 보여준다. 성당 내부에는 아무도 없다. 이 장면은 후일의 증언과 대담으로 재구성된 장면이다. 아무도 없는 성당 내부. 그 위로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는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성우들에 의해 재연된 것이다. 당시를 기록한 영상이나 음성자료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동원 감독은 부재를 재연再演함으로서 당시를 재현再現 해낸다.


<과거는 낮선 나라다>는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산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다. 두 ‘열사’의 죽음을 의롭고 영예롭게 포장하지도 않으며,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았던 군사정권의 치졸함과 추악함을 고발하지 않는다. 이것은 감독의 관심사가 아니다. 심지어 당시 시위의 쟁점이었던 대학생 전방 입소 교육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이다. 카메라의 주요한 시선은 1986년의 죽음 이후로 계속되어온 남아있는 자들의 시간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난 이야기는 이제 그만, 지금 부터는 살아 있는 자들의 이야기 시작.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86년 4월 28일, 신림사거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방입소 반대 시위에서 분신한 故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20주년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당시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사건은 일간지에 아주 작은 쪽기사 정도로 다뤄졌다.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혹은 그럴 수 없었다. 군사정권이 언론과 국민의 입과 귀를 꼭꼭 틀어막았다. 그저 겸손하게 눈을 내리깔고 주어진 삶에 꾸역꾸역 만족하는 척하며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였다. 국가는 아버지였고, 성전이었고, 말씀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을 통해 존재 하게 된다. 그 누구도, 혹은 아무것도 그 죽음을 기억 할 수 있는 것이 남지 않게 될 때, 그 죽음은 부재하는 죽음, 존재하지 않았던 죽음이 된다. 그러므로 묘석은 부재의 증명이며, 죽음의 현존이다. 죽은 자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렇게 남겨진 기억들은 종종 고통스럽다. 그들이 기억하는 자들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이제껏 그래왔듯 삶은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단순하고 명징한 깨달음. 이 둔중하고 날카로운 生의 감각들.


카메라 앞에는 당시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죽은 자들과 직접,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물들이 있다. 그리고 카메라 뒤에는 감독이 있다. 그는 질문한다. 질문은 단답형이다. 그때를 기억하나요? 기억은 정확한가요? 정확하게 몇 시쯤이었어요? 정말 그렇게 기억하고 있나요? 그때 당신은 어디 있었죠? 왜 그런 생각을 했죠? 그 생각을 정말로 그 때 했었나요? 아니면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인가요? 그 말은 누가 했죠? 정말로 당신이 한 말이 맞나요, 아니면 그때 다른 누군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 말을 했던 사람은 누구죠?


이 집요한 목소리, 위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질문들은 의도적으로 당시의 기억을 불러낸다. 인물들은 화창한 대낮의 배경을 뒤로하고 앉아 있지만, 우리는 인물들이 마치 취조실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경험한다.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로 찍혀진 인터뷰 장면들은 소리와 보이는 것의 몽타쥬를 통해 플래시 백 한 번 없이 당시의 공기를 바로 지금 여기, 관객 앞에 꺼내 놓는다. 증언 할 것을, 기억해 낼 것을 담담하고 차갑게 재촉하는 질문들은 80년대 취조실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후반 작업을 통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차가운 감독의 목소리는 취조실 바깥의 어둠 속, 멀리 과거에서 다시 올라온 것처럼 들린다. 만약 당신이 이 목소리가, 이 기괴한 인터뷰를 섬뜩하게 느꼈던 단 한 순간이라도 있었다면, 이러한 과거의 목소리의 근원이 현재에서도 그 힘이 여전하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기 때문이다. 이때 관객은 화면 속 인물들이 존재하는 공간 바깥에 철저하게 방치된다. 이 자리는 개입이 용납되지 않으며 동시에 안전하다. 구경꾼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이 충돌될 때, 이 충돌을 통해 드러나는 과거는 (이미) 사라진 것이 아니다. 현재는 과거의 지속이다. 혹은 과거는 현재의 지속이다. 그런데.


기억은 공유될 수 없다. 기억이 초래하는 감정 역시 그러하다. 당사자가 아닌 이에게 타인의 기억은 그저 이야기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개인의 기억은 공공의 것이 될 수 없다. 물론 연민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연민은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연민은 종종 상상력이 풍부한 이에게 더 많이 허락된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때, 혹은 상상할 수 있을 때, 미약하게나마 연민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렇다면 이 가능성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적어도 이 질문에 영화는 어느 쪽으로도 대답을 준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과거는 낯선 나라다>가 (너무도 당연하게) 취하는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이다.


개인적 감정의 개입 없이 철저하게 객관적 팩트들만을 말할 것을 재촉하는 감독의 질문은 인터뷰이들의 증언들을 통해 관객들을 당시의 현장 속으로, 그 시간을 겪었던 이들이 숨 쉬고 움직였던 공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동시에 관객의 감정적 접촉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관객에게 인터뷰이들의 경험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어렴풋이 감지될 수도 있었던 순간, 바로 그 앞에서 영화는 한 발 뒤로 슬쩍 물러난다. 혹은 밀어낸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차갑고 잔인하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타인과 타인 사이의 이해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가 몹시 차갑고 냉정하며 잔인한 영화라는 지적에 감독은 수긍했다.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크린과 관객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또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다루었던 다른 영화들이 거짓말이라고, 그것은 위선일 뿐이라고 시비를 걸지도 않는다. 부재와 침묵은 이 영화가 선택한 정당한 방법과 언어일 뿐이다. 만약에 분신한 두 사람에 대해 남겨진 자료들이 존재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면, 이 영화를 다루는 방식은 달라졌을 것이다. 애초에 <과거는 낯선 나라다>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 부재에 대한 명징한 인식에서 출발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지어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흔히 이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여 질 수 없다. 그러니 그냥 방치하라, 혹은 잊어버려라’ 는 식으로 통용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적어도 이 영화의 자장 안에서는. 이 영화의 반 이상이 인터뷰이 들의 ‘말’로 채워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수많은 질문과 대답은 거의 속사포처럼 쏟아진다. ‘당시 사건에 대한 아무런 공식적 자료도 남아 있지 않았다.’라는 감독의 말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정보량은 엄청나다. 이것은 마치 기억의 낱장 카드들을 있는대로 늘어놓고, 그중에 적합한 것을 찾아내려는 끊임 없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말하여질 수 없는’ 과거를 적극적으로 말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가장 안전하게 받아들이는 말의 체계와 그로 인해 형성된 현재의 기억들과 시간들, 그 중심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정당한 말, 정당한 기억의 형태를 찾아냄으로써, 안락한 현재 위에 편리하게 오도된 침묵과 망각속에 방치되어 있던 시간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애도행위이다. 애도는 죽은 자를 그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 말하라. 죽은자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과거는 낯선 나라다 (2007)
감독 : 김응수




2009. 8. 1.




Posted by 느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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